[동양사] 제1차 아편전쟁
- 최초 등록일
- 2003.05.26
- 최종 저작일
-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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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1. 아편전쟁 전의 중국과 세계 정세
2. 외국 무역과 아편의 범람
3. 아편전쟁의 발발과 경과
4. 아편전쟁의 실패원인
5. 아편전쟁의 영향
본문내용
1. 아편전쟁 전의 중국과 세계 정세
아편전쟁(아편전쟁) 전야, 중국은 봉건 사회의 말기로서 청조(청조) 통치하의 몰락해 가는 독립 봉건 국가(봉건국가)였다. 소농업과 가내 수공업이 결합된 자연 경제가 봉건 사회의 경제적 기초였고, 봉건적 토지 소유제가 기본적 토지 소유제로서 지주는 절대 다량의 토지를 점유하고 농민은 극히 소량의 토지를 소유하거나 혹은 토지를 점유한 황제가 전국의 최대 지주였다. 지주의 대토지 겸병도 심화되어 갔으며,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은 조세의 부담까지 가지고 있었다. 조세의 납부 외에도 부가적인 실물을 납부해야 하였으며, 또한 고리대의 수탈을 받아 생활이 몹시 곤란하여 항상 파산지경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농민 계급과 지주 계급의 모순이 당시 사회의 주요 모순을 이루었다.
아편전쟁 전 중국 봉건 사회 내부에는 이미 자본주의 맹아(맹아)가 배태(배태)되어 각지 각 부문에서 성장하고 있었고 방직, 제지, 제당, 제차(제차), 야철 등의 분야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수공업이 나타났다.
농업에서도 농산물의 상품화 경향이 점차 뚜렷하게 되어, 면화, 담배, 고구마, 차(차) 등의 경제 작물이 대규모 면적에 재배되었고 어떤 곳에는 자본주의 맹아적 색채를 띤 고용 노동 경영의 상황도 출현하였다. 모택동은 이에 대해서 "설사 외국 자본주의의 영향이 없었더라도, 중국은 마찬가지로 느리게나마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주의 맹아가 당시 사회 경제 속에서 차지한 비중은 매우 작았고 봉건 제도에 의해 심한 압력을 받았으므로 발전은 극히 더디었다.
참고 자료
1. 신승하 저,『중국근대사』, 대명출판사, 1990년
2. 조시원·풍흥성 주편,『중국 근대사』, 청년사, 1990년
3. 조너선 D. 스펜스지음,『현대중국을 찾아서 1』, 이산, 1998년
4. 수잔나 퀸·이블리 S. 로스키 지음, 정철웅 옮김,『18세기 중국사회』,신서원, 199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