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변법
- 최초 등록일
- 2014.02.10
- 최종 저작일
-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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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무술변법
2. 무술변법의 목표
3. 무술변법의 전개
4. 주요 인물
5. 서태후
본문내용
무술변법
무술변법은 청나라 말 1898년에 변법자강을 목표로 일어난 개혁운동으로 무술년에 일어난 변법운동이라 하여 무술변법이라고 하며 변법자강운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과 애로우호전쟁, 청불전쟁을 거치며 서구 국가들에게 연거푸 치욕을 당했다. 여기에 국내적으로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서양의 힘을 빌려서 가까스로 진압할 수 있었다. 이로써 청나라가 얼마나 약한지를 나라 안팎이 전부 알게 되었다.
패전의 경험에서, 유럽의 무기 · 기술만을 도입하려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의 한계를 깨달았고, 서양의 제도와 법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나라 전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변법론이 점차 힘을 얻어갔다.
그러던 중 정식으로 개혁에 착수한다는 황제의 조칙이 내려지고, 캉유웨이, 량차치오, 탄스퉁 등 변법파(變法派)를 등용하여 그들의 주장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관료사대부층의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으며 게다가 민중들의 지지도 거의 받지 못하여 점차 고립되어 갔으며, 결국 서태후(西太后) 일파의 무술정변 쿠데타로 불과 100여 일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런 이유로 무술변법을 ‘100일 유신’이라고도 한다.
<중 략>
서태후는 혁흔과 공모하여 당시의 실권을 쥐고 있던 숙순 일당을 몰아내었다. 그 후 초반에는 수렴청정을 원만히 잘 해 나갔으나, 권력을 점차 개인적인 목적에 남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1874년, 동치제가 친정을 시작한 지 1년여 만에 죽게 된다. 이에 서태후는 순친왕(함풍제의 동생) 혁현의 둘째 아들이며, 자기 여동생의 아들이기도 한 4살 난 어린 재첨을 왕위에 올려 덕종(德宗, 1875~1908), 광서제(光緖帝)로 즉위했다.
광서제가 즉위한 후, 수렴청정에 들어간 서태후는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혁흔이나 함께 수렴청정을 했던 동태후도 모두 방해자가 되었다. 곧 동태후는 1880년에 급사하게 되는데 서태후가 준 떡을 받아먹고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 후 5년이 지난 뒤인 1885년에 군기대신이었던 혁흔이 실각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