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민론
- 최초 등록일
- 2014.01.28
- 최종 저작일
- 2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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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작가론
2. 호민론
3. 생각해보기
4. <홍길동전>과 관련하여 허균의 작가의식에 대하여 논의해 보자.
5. <호민론>의 한계와 시사점에 대하여 논의해 보자.
6. 학습지도안
본문내용
교산(較山) 허균(許筠)은 <홍길동전>의 작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당대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것들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더욱 주목되는 인물이다. 비록 현실정치의 한계로 인하여 그의 생각이 당시의 지배계층인 사대부들에 의해 수용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는 선구자로서의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전기를 검토해 보면 그에게서 지사적(志士的) 풍모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부정적인 삶의 모습을 여러 군데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천지간의 한 괴물"(광해군일기)이라거나 "강상(인륜)을 어지럽히고 행실을 더럽혀서 인륜이 없었다."(명륜록)는 따위의 혹평을 받았다.
그가 정치적인 부침을 거듭하면서 보여준 행동들이란, 시각을 달리 해서 보면 당대의 지배 권력에 맞서 그 모순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빚은 결과들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 하면, 허균은 여러 모로 중세 사회가 갖고 있던 모순들을 인식하면서 당대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인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두루 이정하고 있듯이 뛰어난 문학적 재능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홍길동전>이라는 한글 소설을 쓴 작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비범한 작가 의식의 소유자라는 점에서도 허균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꼭 필요하다.
1. 작가론
1.1 생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허균은 선조 2년 서울에서 초당 허엽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허균은 어렸을 때부터 시를 잘 지어 칭찬을 받았는데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손곡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1589년(선조 22) 생원이 되고, 1594년 정시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지냈다.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다가 서울 기생을 끌어들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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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