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일어난 농민항쟁
- 최초 등록일
- 2014.01.26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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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 후기에 일어난 농민항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는 1811년(순조11)에 발생한 황해도 곡산지방의 농민항쟁과 우리에게 19세기 농민항쟁 중에 대규모 농민항쟁으로 잘 알려져 있는 1862년(철종13) 일어난 임술 농민항쟁을 중심으로 해서 조선후기 농민항쟁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이글의 한상권 교수의 1811년 황해도 곡산지방의 농민항쟁이란 논문과 박필숙 교수의 임술민란과 상주라는 논문을 요약·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농민항쟁에 대한 저의 생각을 여러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 하였다.
1811년 황해도 곡산지방의 농민항쟁은 변혁운동선상에 농민들의 대중적인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곡산농민항쟁을 전개과정, 원인, 참가세력, 지배층의 입장 등의 순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곡산농민항쟁은 짧게는 50일, 길게는 약 100일 간에 지속된 장기항전이었다. 1811년 2월 23일 곡산 민들은 능장, 단봉, 인추 등의 초보적인 무장상태로 관아에 돌입하여 병부의 인선을 탈취하였다. 그리고는 박종신을 빈섬에 넣어 읍 밖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이 와중에서 농민들은 수령으로부터 다짐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이어 옥문을 부수고 창감과 색리를 비롯하여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이처럼 일단 봉기목표를 달성한 농민들은 자진해산하지 않고, 읍지에 머물렀다. 이들은 읍내에 머물면서 관군의 반격에 대비하여 전열을 가다듬으며 훈련을 하였으며 위세는 수령권을 능멸할 정도로 드높았다. 이에 진압을 위해 출동한 3읍 수령들은 농민들에게 자진해산을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곡산농민항쟁의 이와 같은 전개양상은 19세기의 변혁운동이 목적의식적으로 조직화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안핵사의 부임을 계기로 형세는 반전되었다. 안핵사는 3읍 수령의 농민들에 대하 효유자세를 비겁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어 5진의 영장들에게 교졸을 풀어 난민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관군의 공세에 맞서 농민들도 통문을 돌려 지원세력을 확충하면서 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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