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최초 등록일
- 2014.01.22
- 최종 저작일
- 2013.12
- 2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목차
1) 임시정부의 수립
2) 임시정부의 건국강령
3) 임시정부의 조직과 변천
4)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의열투쟁
5) 임시정부의 헌법과 이념
6) 임시정부의 주역
7)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
본문내용
3. 관리정부 형태의 국무회의제
•1927년 4월 11일 발효한 신 헌법 제 2조 "大韓民國의 最高勸力은 臨時議政院에 있다."
: 권력구조면에서 정부의 위치를 약화시키고, 정부에는 책임수반이 없는 국무회의제로 운영하는, 관리정부형태를 채택함.
•국무회의제가 갖는 특성
: 주석에 관계없이 국무위원 과반수(최소 3명)만 있으면 정부는 존재할 수 있었음.이 때문에 무정부상태가 쉽게 오고, 정부가 의정원에 예속되어 있었으므로 의정원이 있는 한, 무정부상태가 오더라도 복구가 쉬웠다.
•국무회의가 명령을 발할 때는 의정원 상임위원회의 사전동의를 받아야할 정도.
•의정원에 상임위원회를 설치, 정보의 보호 또는 감독체제를 갖추고 있었다는 자체가 행정부를 의회에 예속시킨 조처.
정치권력은 상임위원회에 집중
•국무위원의 임기 3년. 국무회의의 주석은 국무회의의 의장에 불과했음.
•이당치국(당으로 나라를 다스림)하는 소련 또는 중국의 체제를 도입함.이 규정으로 행정부가 정당과 의회의 이중적 압력 아래 놓이게 되어 더욱 약체의 길을 걷게 됨.이당치국의 기술은 중국 국민당 등의 영향을 받은 것. 하지만 원리는 국민적 조직인 민족대당을 모색하여 임시정부의 국민적 기반을 회복하려는 의도. 하지만 실패하여 임시정부만 타격을 입게 됨.
•민족대당(유일당)작업이 일어나고, 실패를 거듭하며 임시정부는 계속 흔들리게 됨.하지만 이 시도는 국민적 기반의 회복을 위한 노력이었음.
•1932. 윤봉길의 의거로 임시정부가 되살아남. 명분을 찾게 되었고 국민적 관심을 모으게 됨. 그러나 윤봉길의 의거로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야 했으며 각료들은 숨어 다녀야 했음.
그 와중에 중일전쟁이 일어나, 항주>진강>장사>광동>유주>기강>중경으로 옮겨 다님.
임시정부는 이렇듯이 약체정부였기 때문에 관제는 무용지법.
명목유지를 역할로 한 정부였으므로 다른 조직도 없었음.
참고 자료
이연복, 『대한민국임시정부30년사』, 국학자료원, 1999
한국근현대사학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기념논문집(상/하)』, 국가보훈처, 1999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연구』, 지식산업사, 2004
조동걸, 『우사 조동걸 저술선집 08-대한민국임시정부』, 역사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