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의 역사와 유래, 거문고와의 비교, 가야금 산조에 대하여 짧게 요약한 자료입니다.
- 최초 등록일
- 2014.01.06
- 최종 저작일
- 20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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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가야금의 역사
2. 가야금 산조
3. 가야금과 거문고의 차이
본문내용
1. 가야금의 역사 (연혁, 종류,etc)
가얏고라고도 한다. 오동나무 공명반에 명주실을 꼬아서 만든 12줄을 세로로 매어 각 줄마다 안족(雁足:기러기발)을 받쳐놓고 손가락으로 뜯어서 소리를 낸다. 줄풍류를 비롯하여 가곡반주·가야금산조·가야금병창 등 한국음악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있다. 청아하고 부드러운 음색으로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국악기이다.
연혁
《삼국사기》에 가야금은 가야국(伽倻國)의 가실왕(嘉實王)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고 하나 가실왕 이전인 신라 자비왕(慈悲王:재위 458~479) 때 백결선생(百結先生)이 금(琴)을 쳤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에는 신라 내해왕(奈解王:재위 196~230) 때 물계자(勿稽子)가 금을 쳤다는 기록도 있다. 이밖에 최근 경주시 황남동(皇南洞) 능원(陵園) 경내 폐고분에서 발굴된 토기 장경호(長頸壺)의 목부분에 새겨진 가야금의 주악도(奏樂圖)를 신라 미추왕릉(味鄒王陵)의 것으로 추정한다면, 가야금의 연대는 3 세기 초로 소급된다. 이상과 같은 문헌과 토기로 보아 가야금은 3 세기경 가실왕이 중국의 쟁(箏)을 본떠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552년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악사 우륵(于勒)은 가야금을 들고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다. 이때 진흥왕은 그를 받아들여 국원(國原:현 忠州)에 자리잡게 하고, 대내마(大奈麻)인 법지(法知)와 계고(階古), 대사(大舍)인 만덕(萬德)을 제자로 삼게 하여 그 업을 전수하게 하였다. 그후 가야금은 노래와 춤의 반주악기로 사용되었으며, 고구려·백제의 것과는 다른 가야금이 사용된 독특한 신라음악을 낳게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