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의 정치세력과 정치운영
- 최초 등록일
- 2014.01.06
- 최종 저작일
- 20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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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근세사 '조선의 붕당정치'에 관한 심도있는 레포트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붕당정치의 개념
Ⅲ. 붕당정치의 성립과 전개
1. 붕당정치의 효시
2. 붕당정치의 전개
Ⅳ. 붕당정치의 변질과 쇠퇴
Ⅴ. 붕당정치의 운영형태
1. 비변사중심의 공존체제
2. 삼사언론의 활성화
3. 서원의 정치적 기능
4. 관료충원방식의 변화
5. 군영설치와 증강
Ⅵ. 붕당정치의 의의와 한계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조선시대 정치사는 당파성론의 영향을 크게 받아 부정적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했다. 일본 어용학자 및 언론인들은 한국 국권 침탈 초기부터 조선시대 정치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른바 당파성론(黨派性論)을 창출했다. 한국인은 정치적으로 서로 싸우기를 좋아하는 민족성을 가져 망국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들의 논점이었다. 당파성론은 다른 식민주의적 역사 해석과 함께 일제의 국권탈취를 합리화, 정당화하고 한국인에게 패배주의 의식을 심어 식민 통치를 감수하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식민주의 사관의 일환으로 창출된 당파성론은 한국인들에게 의외로 많은 영향을 끼쳐, 일제 강점아래에서는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어도 쉽게 시정되지 않았다. 그러다 해방 후 1970년대부터 이러한 반대 의견들이 주목받으면서 조선시대 정치사, 사회사를 적극적으로 고찰하는 연구들이 나왔고, 종래의 당쟁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극복되기 시작했다.
<중 략>
환국정치 이후 서원은 겉으로는 사림공론의 수렴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私黨정론의 소굴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와 동시에 서원은 정쟁의 와중에서 화를 당한 당인에 대한 신원과 이를 통한 특정 정파의 정치적 도덕성을 합리화해주는 도구로 점차 변모하게 되었다.
(3) 지방여론 수렴의 창구
붕당정치기의 서원은 중앙 정계와 지방 사림간의 연결 통로였다. 특히 조선의 붕당이 학파적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이러한 경향은 심화되었다. 각 붕당은 집권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자파 정론의 정당성에 대한 일반 사림의 광범한 지지를 얻어야 했다. 따라서 이들은 지방 사림의 거점으로서 지방의 여론이 결집되던 서원과의 연계를 중시하게 되었다. 한편 지방 사림들은 일본?청과의 전쟁 이후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향촌질서의 재건을 위해 서원에의 결속을 강화하고 중앙 고위 관료의 지지를 필요로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 정계와 지방 사림은 서원을 통해 서로 연결될 수 있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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