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회
- 최초 등록일
- 2013.12.31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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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초기 임시정부의 성격
2. 3․1운동이후 민족운동
3. 신간회(新幹會)의 성립
1) 신간회의 성립요인
(1)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
(2) 민족주의 좌파그룹에 대한 사회주의계의 긍정적 인식
(3) 코민테른의 전략적 의도
2) 신간회의 성립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3․1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한국인에게 외견상 자유를 허용하는 듯 꾸미면서, 내적으론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고 민족 경제를 파탄시키며, 3․1운동 때 결성되었던 범민족운동 세력을 와해시키는 작업을 추진했다.
특히 민족운동세력간의 갈등과 마찰을 조장하여 민족의 독립역량을 소멸시키려는 이간책을 끊임없이 펴나갔다. 이 같은 시대적 환경변화에 대해 민족운동 세력은 단합된 역량과 투쟁 방법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자체분열이라는 비극적 현상을 노출했다.
신간회는 3․1운동 이후 국내에 남아있던 민족운동 세력이 이념을 초월하여 1927년 2월에 창설된 남성 민족운동 단체이며, 근우회는 그 자매 기구 성격을 띤 여성 민족운동 단체였다. 특히 신간회는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민족주의’를 탄생시킨 범민족 단체로 민족운동사에 차지하고 있는 의미가 크다. 즉 일제와의 타협을 배제한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구성한 ‘반제(反帝), 반식민(反植民), 반봉건(半封建)의 민족운동 집합체’였다.
이같이 상반된 이념과 방향노선을 갖고 있던 세력들이 하나로 결집되기 위해서는 모든 세력이 동감할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했다. 그 역할을 한 인물이 YMCA운동가 이상재였다. 그러나 신간회가 ‘범민족 독립운동단체’로 결성된 지 1개월 만에 회장인 이상재가 급서(急逝)하고 허헌을 중심한 사회주의계가 신간회를 주도하게 되면서 운동방향도 노동쟁의와 소작쟁의 지원, 대중 집회를 통한 정치적 투쟁 등 과격한 방향으로 변했다.
1927년에는 신간회 창설을 묵인하였던 일제도 1928년 제2차 공산당사건 연루자 40%가 신간회회원임이 드러나자, 신간회 집회를 불허하고 취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29년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민중집회를 구상했던 신간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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