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열전-사마천, 궁형의 치욕 속에서 역사를 성찰하다』를 읽고
- 최초 등록일
- 2013.12.29
- 최종 저작일
- 20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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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사마천의 일에 대한 집념과 자부심 그리고 천재성에 대해”
“우리는 기련산을 잃어 가축을 먹일 수도 없고, 우리는 연지산을 잃어 여인들의 얼굴을 물들일 수도 없다.” 우리에게 오랑캐의 대명사로 알려진 흉노의 이 서글픈 민요에 등장하는 연지산은 한국 결혼문화인 연지, 곤지의 기원이 되는 연지 꽃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기련산과 연지산은 현재 중국 간쑤성과 칭하이성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흉노의 거점이었으나 한 무제에게 정복당했고, 그 시점은 기원전 1세기 직전으로 한 무제가 고조선에 한사군을 설치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티베트로부터 시작해 백두산까지의 광활한 지역을 고대부터 지배해 왔다고 주장하는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 속에서 ‘흉노’는 숨기고 싶은 중국의 아픈 과거다. 흉노에 관한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마천의 ‘사기(史記)’로부터 시작된다. 사기는 흉노에 대해 언급하면서 동아시아에서 침략적 유목민(오랑캐) 대 문명화된 정주민(한족)의 이분법 구도를 처음 정립했다.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학자(B.C.145~85)로, 아버지 사마담이 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이 된 후 그 영향을 받아 역사 기술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한 무제 하에 관리를 지내면서 한나라 전역을 여행하고, 이를 통해 견문을 넓히며 사기저술에 필요한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게 되었다. B.C. 104년 사마천은 부친의 유언에 따라 10여년에 걸쳐 사기 집필에 착수하였으나, 친구 이릉을 변호하다가 한 무제에 의해 궁형을 받게 된다. 궁형을 당할 것인가, 아니면 자결을 택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길목에서 사마천은 한신(韓信)이 동네 사람의 가랑이 밑을 기어 나가 훗날 중용되었듯이 궁형의 치욕을 감수하고라도 살아남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편이 현명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후 다시 황제의 신임을 얻고 환관의 최고 직위인 중서령(中書令)에 올랐으며, BC. 90년에 드디어 사기를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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