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남북국의 문제
- 최초 등록일
- 2003.05.09
- 최종 저작일
-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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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는 말
Ⅰ. 발해에 대한 신라인들의 양면적 인식
Ⅱ. 신라와 발해의 정치적 교섭
1) 발해건국기(8세기 초)의 교섭
2) 신라 귀족항쟁기(8세기 말∼9세기 초)의 교섭
3) 발해멸망기(10세기 초)의 교섭
Ⅲ. 발해의 주민구성
나오는 말
본문내용
들어가는 말
신라와 발해를 한국사상 「남북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후기 유득공의 《발해고》부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 후 일제 한국강점기의 발해사는 한국사와는 별도로 발해사의 영역에서 대개 취급되었다. 그러다가 발해사는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남·북사학계를 중심으로 한국사상에 다시 새롭게 부각되었으며 이에 대한 반성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남북국사가 한국사상에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고 만은 할 수 없다. 이 같은 이유는 사료부족에도 그 원인이 있겠으나, 더욱 큰 이유는 남북국사에 대한 인식의 한계성 때문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요즈음 대부분 통사들이 지지하고 있는 신라중심적 「통일신라와 발해」라고 하는 시대구분방법인데, 이는 분명 양국을 대등한 입장에서 보는 「남북국」과는 거리가 있는 용어이다. 또 하나의 이유를 든다면, 나·발의 관계 곧 남국과 북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만한 연구업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나·당이나 발·일의 관계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주목을 받아 왔으나 남북국의 관계에 있어서는 전무한 상태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남북국의 관계에 있어 대개 알려진 사실들로써는, 발해의 당 등주공격으로 인한 신라의 발해남변 공격사건, 당나라 조정에서 있었던 남북국의 윗자리 다툼사건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료들은 주로 신라와 발해가 대립적인 면을 지켜왔다는 데에 이용되었다. 그러나 남북국은 200여년간 줄곧 이렇듯 대립적 관계만을 지켜왔던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서로가 그들의 필요에 의해 사신을 파견한 적이 있었다는 몇 개의 기록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발해에 대한 신라인들의 양면적 인식이 어디에서 오는가와 남북국에서 각각 두 번에 걸쳐 사신을 파견한 기사에 주목하여 어떠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 같은 교섭을 시도하였고, 그 성과는 어떠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다. 덧붙여 발해의 주민구성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남북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도록 하자.
참고 자료
韓圭哲, 「新羅와 渤海의 政治的 交涉過程」, 『韓國史硏究』43, 1983
盧泰敦, 「渤海國의 住民構成과 渤海人의 族源」,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一潮閣,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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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圭哲, 「渤海建國과 南北國의 形成」, 『韓國古代史硏究』5, 韓國古代史硏究會, 1992
韓圭哲, 「渤海의 對外關係詞」, 신서원,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