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 최초 등록일
- 2003.05.05
- 최종 저작일
-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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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가 직접 책을보고 정리한 내용입니다....
시대순으로 그 사람들 약력까지 참고해서 넣습니다...
잘활용하시길,....^^
목차
1. 성리학을 전래한 안향(安珦)
2. 이제현(李齊賢)의 학문과 교육사상
3. 이색(李穡)의 학문과 교육사상
4. 정몽주(鄭夢周)의 학문과 교육사상
5. 길재(吉再)의 학문과 교육사상
본문내용
1. 성리학을 전래한 안향(安珦)
안향은 충렬왕대를 전후하여 활동한 대학자로, 호(號)는 회헌(晦軒)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무인집권기인 고종 30년(1243)에 경상도 순흥부(順興府) 죽계상(竹溪上) 평리촌(坪里村)에서 출생하여 충렬왕 32년(1306)에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유학에 전념하였고, 이로써 그는 유교적 통치이념을 그의 정치철학으로 배양하였을 것이다. 그가 관로에 나아가자 무인적인 강건한 성격으로서 유교적 통치이념의 구현을 과감하게 실행한다. 그는 충렬왕 15년에 왕을 호종하여 연경(燕京)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교유하는 과정에서 성리학을 접하게 된다. 그는 성리(性理)의 서(書)를 보고 이를 베끼고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진상(眞像)을 모사하여 다음해 3월 귀국할 때 가져오니, 이것이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전래된 시초이다.
성리학을 수용한 이후 그는 거의 거재(居齋) 후편에 정사를 지어 공자와 주자의 진영(眞影)을 봉안하고 다시 연경에 갔을 때는 「시종충선왕여원시감음(侍從忠宣王如元時感吟)」이란 시를 지어 원나라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또 그는 불교에 대하여도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충렬왕 20년 동남도병마사(東南都兵馬使)가 되어 합포(合浦)에 출진하였다가 서울로 귀환하는 도중에 김해에 있는 감로사(甘露寺)를 순방하고 지은 시에서 보이고 있다. 그는 여기서 백성들은 지금 국난으로 도탄에 빠져 굶주림에 헤매고 있는데도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불사를 장식하는 것을 개탄하고 있다.
참고 자료
高麗後期 性理學의 受容과 敎育思想, 申千湜 지음, 明知大學敎 出版部,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