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림의 성장과 발전
- 최초 등록일
- 2003.04.21
- 최종 저작일
- 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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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사림의 대두
2. 권력구조의 변화
3. 정치참여층의 확대
4. 사화의 발생
본문내용
(1) 사화의 발생
사림에 의해서 추구된 일련의 정치변화는 기득권자인 훈구나 공신 재상들에게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 결과 훈구는 사림세력을 배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화를 선택했다.
무오사화 1498년(연산군 4)- 홍문관의 언관화에 기초한 언권의 강화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조의제문)을 빌미로 하여 일어났다. 언론권의 인물들이 주로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무오사화가 언권을 중심으로 하여 왕권과 재상권을 견제하려는 사림의 권력강화에 대한 반발로 야기되었음을 보여준다.
갑자사화 1504년(연산군 10)- 왕과 재상의 갈등이 심화되자 재상들은 궁중의 경비를 절약하고 왕의 방종을 견제하려 하였으나 외척들이 연산군을 지원하여 일어났다. 폐비 윤 씨의 사사(사사)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어 추죄하였다.
기묘사화 1519년(중조 14)- 중종대에 낭관권의 형성으로 권력구조가 새롭게 재편되면서 사림의 권한이 확대되었고, 그를 통한 사림의 진출이 강화되면서 훈구와 사림사이에 새로운 긴장이 감돌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림의 개혁정치에 위기의식을 느낀 중종이 훈신들과 결탁하여 사림을 공격하였다.
을사사화 1545년(명종 1)- 왕과 공신세력은 무오사화 직후에 보여주었던 주도권 장악을 위한 상호대결을 피하고 결속을 강화했다. 외척은 양자의 이해를 조정하는 역할을 하면서 권신의 위치를 점하였는데 이들은 언권과 낭관권을 장악하려고 하여 사림들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을사사화는 이러한 정치구조에 기인하여 인종과 명종의 즉위를 둘러싼 외척들간의 다툼에 사림세력들이 말려 들어가 일어났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