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양민학살사건에 대해
- 최초 등록일
- 2003.04.20
- 최종 저작일
- 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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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밝은 내일이 오기를..
목차
1. 시대적 배경
2. 사건의 전개
3. 사건의 의미
4. 맺음말
본문내용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에서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비극이 자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극은 아직까지 우리의 마음속에 커다란 응어리가 되어 남아있다. 도대체 1951년 거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어떤 일이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이 '거창 양민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 걸까?
그 비극의 시작은 한국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은 각자의 이념을 앞세운 싸움을 진행하고 있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대립은 그 이전부터 계속되어 왔지만, 한국전쟁이라는 한 역사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정도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사회주의를 앞세운 인민군은 무서운 기세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한국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경상도 일부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을 인민군의 손에 넘겨주게 된다. 이 때 미국은 자유주의 수호라는 모토아래 유엔군과 함께 남한 정부를 도와준다. 한국전쟁에서 계속해서 패배하던 한국군이 그 전세를 역전시키게 된 계기는 바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게 되자 3.8선 이남지역에 주둔하던 인민군 중 일부는 돌아갈 길을 차단당하게 된다. 그 결과 인민군들은 속칭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 등지의 험한 산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아 게릴라전을 행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시대적 배경이다. 지리산에 근거를 두던 빨치산은 어두울 때를 틈타 관공서나 경찰서 등지를 습격하였는데, 여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한국군은 급기야 '빨치산 토벌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