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전 기아사장 김선홍 회장
- 최초 등록일
- 2003.04.14
- 최종 저작일
- 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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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칭찬받은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_김선홍 회장의 출생
본론_김선홍 회장의 일대기(전성기)
결론_김선홍 회장의 퇴임
본문내용
또 하나는 새로 발주한 독일제 기계가 들어와 전 직원이 매달려 조립 작업을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조립이 쉽지 않았다. 여러번 조립을 해봤으나 끝내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말았다. “독일놈들이 불량 기계를 보낸 거다.” 이렇게 치부하고 손을 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작업반에 끼지도 못한 채 어깨너머로만 엿보는 처지였는데, 그러다 손을 터는 걸 본 다음 견해를 밝혔다. “연결봉 크기가 각각 다를 겁니다. 작은 것부터 조립해 나가는 것이 순서일 듯싶습니다.” 독일 제품은 0.1mm씩 굵기가 다를 만큼 정교했기 때문에 차질을 빚었던 것이다. 그 이후 “배운 사람이 다르다.”는 말을 들으며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부장으로 승진했을 무렴 기아는 자전거를 자체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또 공을 세웠다. 자전거 자체 생산 시기와 때를 맞추어 체인을 만드는 설비 중 하나인 노(爐)를 설계한 적이 있었다. 그 때까지 쓰고 있던 노는 니크롬선이 수명을 다할 경우 대체가 안되기 때문에 공장가동이 문제가 될 상황이었다. 그는 고민끝에 국내 최초로 기름을 사용하는 노를 만들었으며 이것을 기존의 노가 수명이 다하기 직전에 교체하도록 했다. 이 사건으로 선대 김회장으로부터 “도깨비 같은 놈!”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김선홍은 1970년 서른여덟 살에 이사로 지급했다. 그해 7월 7일 선대 김회장은 “자동차 공장을 지을 준비를 하시오”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하면서, 부지가 그려진 지도를 꺼내 놓았다. 김회장은 고속도로 개통에 맞추어 광활한 대지를 자동차 공장용도로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김철호회장의 뜻에 따라 3년여 만인 1973년 6월 책임자로서 소하리 공장을 준공했다. 이것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일괄공정 시스템을 갖춘 종합 자동차 공장이었다.
연산 2만5천대의 생산 능력을 갖춘 소하리 공장의 탄생은 실로 우리나라 자동차 공업의 신기원이라고 할만했다. 바로 한달 뒤 국내 최초로 2천cc 4기통 브이에이 가솔린 엔진을 개발했고 그 엔진 50여대를 일본에 수출했다. 이 엔진 개발에 이어 기아는 소형차 생산 기술
참고 자료
참고문헌
http://hometown.chollian.net/%7Esongwoo/today047.htm
http://www.naex.com/data/%B3%D8%BD%BA%B4%BA%BD%BA/1999/2%BF%F9/0227-2.html
http://www2.donga.com/fbin/woman_donga?d=9709&f=wd9709aa0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