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비교연구회 3차재판정리
- 최초 등록일
- 2013.10.25
- 최종 저작일
- 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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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6.3 학생운동 사회 정치적 배경
2장 민족주의 비교 연구회
1. 64년 1차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재판
2. 65년 2차 민족주의 비교연구회재판
3. 3차 67년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재판
본문내용
4. 19 혁명은 비록 비체계적인 형태이기는 했지만 민주주의의 정착 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지행했다. 그러므로 이승만 권위주의의 독재정군에 의해 종형된 반민주적 정치체제는 4.19 혁명의 직접적인 변혁대상이었다.
4. 19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4월 26일에 종결된 것이 아니다. 4.19 혁명의 주체세력들은 비록 집권을 하지는 못했지만 5.16 쿠데타로 좌절되기까지 끊임없이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과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비굴한 한일협정을 들 수 있다. 비굴한 한일 협정으로 많은 학생들의 많은 시위를 유발했다. 4월말에 재개된 시위는 정부의 학원사찰과 강경책으로 5월 들어 좀 수그러 들다가 5월 20일 ‘한 일 굴욕 외교 반대 대학생 총연합회’가 주최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2장 민족주의 비교 연구회
1. 64년 1차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재판
(1)배경
서울 문리대생은 1963년 초부터 한일 회담 반대학생운돈을 준비 겨울방학 때는 거사날짜를 잡고 개학을 기다리면서 사실상 6.3학생운동에 불을 붙이고 이를 지속시킬 수 있는 조직을 만들었다. 김중태(정치4)가 조직과 고려 연세등 타교와의 연락등 중심 역할을 하고 현승일(정치4)이 현장지휘, 최혜성(철학4)이 자금, 김도현(정치4)이 선언문 등 문건 작성을 분담 한 학년 아래인 박삼옥 박용한 김헌출 전계수 이현배 등도 각각역할을 맡아 3우러 17일을 첫 번째 결행일로 잡았다가 한 번 연기해 3월 24일 드디어 횃불을 올렸다.
서울대는 3월 24일 오후 1시 20분경, 3월 23일의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주최 한일 관계 강연회에 이어 ‘제국주의자 및 민족 반역자 모의 화형식’을 거행했다. 3.24시위를 주도한 조직은 서울 문리대의 비공식 조직인 대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위원장 김중태)였다.
참고 자료
6.3 동지회 지음 < 6.3 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김성원, 김경원 저 < 1960년대> 기획출판 겨름
임영태 정진화 박현희 <거꾸로 읽는 한국사>푸른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