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귀화인
- 최초 등록일
- 2013.10.24
- 최종 저작일
- 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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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귀화의 배경과 그 실태
2. 과거제를 정착시킨 쌍 기(雙冀)
3. 화산 이씨의 시조 이 용 상(李龍祥)
4. 덕수 장씨의 시조 장 순 룡(張舜龍)
5. 청해 이씨의 시조 이 지 란(李之蘭)
6. 귀화인의 영향
*참고문헌
본문내용
1. 귀화의 배경과 그 실태
나말여초의 역사적 진통을 겪으면서 후삼국을 통일하고, 호족세력을 결합하여 중앙집권체제로의 완성을 추구했던 고려 전기의 성격은 관점에 따라 견해를 달리 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독자성, 개방성, 다양성으로 집약할 수 있다. 10세기에서 12세기에 이르는 이 시기는, 중국에 있어서 당제국의 몰락과 오대십국의 난립, 송의 건국, 여진족의 대두 등으로 이어지던 동아시아 세계의 격동기였다. 이와 같은 중국 내부의 혼란과 북방민족의 활발한 움직임은 중국의 주변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 시켰고, 고려로 하여금 외세의 간섭이 없는 가운데 독자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고려는 골품제도 속에서 행정기능에 대한 인식보다 신분체제의 관념이 분명했던 신라사회의 한계를 극복하고, 행정기능과 신분체계를 분리시킨 통치체제를 수립해나간 새로운 모습의 사회였다. 새로운 세력의 형성과 신분질서의 정립과정에서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한 관제가 성립되고 있기는 하지만 신라시대와는 달리 여러 지역의 호족이라든가 국내외의 다양한 세력이 참여함에 따라 개방적인 성격을 강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시대적인 상황에 따른 외부세계와의 폭넓은 접촉을 통하여 축적된 역사적 경험은 다양성이라고 하는 특징적인 면모를 갖추게 해주었다. 사회발전이나 대외관계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경향들은 국제정세와 국내사정의 변화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고려시대전 기간을 통하여 일관성 있게 이어져 갔던 가장 뚜렷한 현상의 하나로 파악된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북방 민족계 국가들과는 물론 송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건국 초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정이 불리하게 전개되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이러한 성격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나말여초의 역사적 진통을 극복하면서 역사 발전과정에서 축적되어 온 민족문화의 역량과 자신감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속에서 건국 초기 고려가 직면하고 있던 최우선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전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사회적 기반과 질서를 다지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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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海李門 시조 조선 건국공신 이지란”/다음블로그(2009.04.20.) http://blog.daum.net/ansdufrhd/11843511 - 2012.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