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생활] 조선시대의 성생활
- 최초 등록일
- 2003.02.24
- 최종 저작일
- 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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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조선시대 성교육
2. 조선시대 간통죄
3. 순결을 위해 아들을 죽인 배씨녀
4. 조혼풍습
5. 남녀칠세 부동석
6. 임신의 조건
7. 조선시대 성범죄
본문내용
규곤의측」이라는 조선시대 양반집 가훈서에는 "남종을 중문 안에 함부로 들여놓지 말 것이며, 벙거지 없이는 더욱더 들여놓지 말라"고 적혀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안의 일 밖에서 모르게 하고, 밖의 일 안에서 모르는 것이 제대로 된 집안"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남녀유별이 생겨난 이유는 조선시대 유교적 윤리관의 일종인 '내외사상'이 남녀의 직접적인 만남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한 것은 아니고 대문 앞 광경의 여종처럼, 춘향과 이 도령을 이어주던 방자나 향단이처럼, 천인들은 남녀 유별에서 비껴남 존재였다.
그런데 유교적 성도덕의 산물이 '내외구별'은 본래 남녀관계에 관한 예절법이었다.
본래 의미에서 내외란 남녀간에 지키는 예의이며, 상호 역할을 분담하고 그것에 딸 공간을 분리하는 예의 기준이었다.
흔히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 는 말도 "일곱살이 되면 남녀는 자리를 함께 하지 않고, 음식을 같이 먹지 않는다." 는 [禮記(예기)]의 구절에서 비롯된 남녀간의 성도덕이었다.
단순한 예절상의 남녀 구분인 내외사상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내외법'이라는 이름으로 법률화되고 강제화 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조선초기에 빈번하게 발생했던 간통 및 근친상간을 규제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법 적용에 있어서 남녀간의 형평이 무시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