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시대의 사회와 경제
- 최초 등록일
- 2013.09.22
- 최종 저작일
- 2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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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명대 향촌조직과 신사(紳士)계층의 변화
1. 이갑제(里甲制)에 의한 향촌질서의 정비 및 변모
2. 명대의 사회계층과 신사(紳士)의 향촌지배
Ⅲ. 明末의 사회변동과 경제구조의 재편성
1. 인구이동과 농촌사회의 변화
2. 면직 ․ 견직업의 발달과 농촌사회의 변화
3. 은화의 유통과 경제구조의 변화
Ⅳ. 사상계의 새로운 바람 : 양명학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명과 청은 근대 이전의 마지막 왕조들이다. 명과 청은 건국 주체는 다르지만 크게 보면 두 왕조를 나란히 묶어 하나의 시대로 부를 정도로 그 성격이 유사하며 이들 왕조에 와서 중화제국의 질서가 완성되었다. 특히 16세기 후기에서 17세기 중기, 명 말에서 청 초로 이어지는 때에는 여러 면에서 사회변화가 현저하게 이루어진 시기인데 이는 비단 명에서 청에로의 왕조교체라고 하는 정치적 변천만이 아니고 사회와 경제전반에 걸친 구조적 변혁이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사회의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신사층이 형성되었고 대규모의 인구이동과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한 농촌사회의 변화, 이에 따른 지주 전호제의 개편, 이갑제 질서의 해체와 부역제도의 개혁, 새로운 사상의 출현 등의 사회 경제적 변화가 두드러진 시기였다. 본 발표문에서는 명 말에서 청 초에서 이르는 중요한 사회 경제적 변화 몇 가지와 새로운 사상이었던 양명학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중 략>
명조 초기에는 몽고족의 풍습을 배제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등 국수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유학중에도 체제유지를 위한 주자학이 관학화해 학문과 사상이 위축되어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양명학이 등장하였다. 명대의 사상을 대표하는 양명학은 명 중기의 유학자 왕양명이 심즉리(心卽理)의 학설을 주장하면서 성립되었다. 왕양명은 청년시절부터 열렬한 주자학의 신봉자로서 성인의 경지는 배워서 도달할 수 있다는 이상주의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이를 위한 방법으로서 주자가 말하는 격물치지설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갖게 되면서 육구연의 심학(心學)에 기울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깨우치게 되었다.
주자학과 양명학은 진리를 깨닫는 방법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주자학이 오랜 기간의 연구와 수양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면 양명학은 정신의 집중에 의하여 한순간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인간의 주체를 이루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며, 이는 본래 절대선(善) 이므로 이를 본래의 모습인 절대선으로 되돌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왕양명의 심즉리의 학설이다. 이를 위해서는 심의 작용으로 가장 중요한 양지(良知)를 충분히 활동시켜야 된다고 하였다. 또 知도 단순히 아는 것만이 아니라 반드시 행동으로 하는 앎이어야 하며 여기에서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이 나오게 되었다.
참고 자료
신성곤, 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1993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강좌 중국사 Ⅳ』, 지식산업사, 2006
신승하, 『중국사』, 대한교과서,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