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근현대사와인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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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제의 식민지 통치 아래서 우리의 지도자들이 생각한 민족 해방의 전략-전술론은 대체로 두가지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켜 점차로 민족의 역량을 쌓아가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만주 같은 곳에 흩어져 사는 교민들을 무장시켜 당장에 일제에 맞서 독립 투쟁을 하는 것이었다. 앞것은 말하자면 점진적인 실력 배양의 이론이요, 뒷것은 직접적인 무장 투쟁의 이론이 되는 셈인데 안창호가 앞이론의 대표자라면 이동휘 장군은 뒷 이론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1919년에 삼일 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그 해 5월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져 안창호나 이동휘가 ㅈㅇ요 부서를 맡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임시정부는 1920년대에 이렇다할 실적을 남기지 못한채로 공전만 거듭하고 말았다. 이처럼 사정이 악화된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 안창호-이동휘로 대표되는 전략-전술 이론의 대립과 갈등이 커다란 몫을 차지한다고 생각된다. 한말의 신민회를 만들 때 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두사람의 전술 대립은 끝내 조정되지 못한채로 끝나고 말았다. 임시정부의 파벌에 싫증이 난 안창호는 미국으로 떠나버렸고 이동휘는 무력 투쟁이론을 열렬히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임시정부의 파벌 싸움에만 열중했다. 그의 무력 투쟁이론은 만주의 동쪽 끝에 위치한 북간도 지방에서 젊은 사자들의 손으로 과감히 실천 되었다.
십구 세기 후반부터 많은 교민들이 떼지어 살고 있던 북간도 지방의 공기는 상하이와 사뭇 달랐다. 여기에서는 민족지사들의 정치 놀음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오직 개척 농민의 절박한 생존 의식이나 국내에서 쫒겨온 의병 부대의 넘치는 투쟁의식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처럼 북ㄱㄴ도의 공기는 신선하였으며, 또 혁명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20년 10월에 독립군과 대규모의 일본군이 맞부딪치는, 다시 없을 무장 투쟁이 펼쳐질 수 있었고 한편으로 투쟁을 성공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이 청산리 전투를 지휘한 것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때의 독립군 사령관인 김좌진은 서른 두살이었고, 그 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범석은 스물 한살에 지나지 않았다.

참고 자료

전태일평전 - 조 영 래 (돌베개,1991)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 박 세 길 (돌베개,1989)
바로보는 우리역사 - 구로역사 연구소 (거 름,1992)
감추어진 독점재벌의 역사 - 이 성 태 (녹 두,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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