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과 서원
- 최초 등록일
- 2013.08.07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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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많은 참고 바랍니다.
목차
(1) 서론
(2) 등홍파, 남민수 『서원과 이학의 일원화』 민족문화논총28집, 2008
(3) 『송명이학에 있어서 서원의 의의』안동학 연구 제11집 111p ~ 147p , 2012
(4) 결론
본문내용
서원의 기원은 중국 당(618~907) 말기부터 찾을 수 있지만 정제화(定制化)된 것은 송(960∼1279)에 들어와서이며, 특히 주자(1130~1200)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열고 도학연마의 도장으로 보급한 이래 남송·원·명(1368∼1644)을 거치면서 성행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학과 서원은 같이 흥했고 쇠했다. 이학은 서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이학과 서원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등홍파, 남민수 『서원과 이학의 일원화』
민족문화논총28집, 2008
이학자가 시작한 서원운동은 영종(寧宗1195~1224) 초기에 “경원당금(慶元─黨禁 1195∼1200)” 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196년에 한탁주가 정권을 잡은 후, 이학을 위학으로 배척하여,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엄하게 금지하였으며 반드시 “위학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해야지만 관리가 되고 승진할 수 있었고, “위학을 하지 않음”을 증명하여야만 과거 시험에 참가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렇게 냉엄한 정세에서, 이학과 이학의 근거지인 서원은 더더욱 냉대를 받게 되었다. 서원은 이학과 함께 영고성쇠를 같이 하였으며 경원당금으로 인해 곤경에 빠졌으니, 이것은 사정의 한 국면이다. 정치적 압박과 학술적 전횡은 일시적으로 서원과 이학의 발전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의 압박과 위협으로 인해 이학과 서원이 더욱 깊게 융합되고, 역량을 집중하고 양자를 동일시하게 되어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 준비와 축적된 역량을 가지게 되었다. 겁 많은 이학 선비들이 의관을 바꾼 것을 통해 우리는 이학의 중견 학자와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강한 세력에 의해 억압받은 것이 아니며 여전히 이학과 서원 사업은 발전에 힘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곽진(郭津 922 ~ 979)이 서원을 세우는 등 사람들이 이학과 서원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학예를 전수하게 하여 위난을 만난 이학이 명맥을 유지하게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