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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7.24
- 최종 저작일
- 20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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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노동운동
Ⅱ.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화운동, 5 18광주민주항쟁)
1. 민주화의 봄
2. 학생운동에서 전면적 민중항쟁으로 전환
3. 광주5월민중항쟁의 새로운 역사적 지평 : 무장투쟁
Ⅲ.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청년운동
Ⅳ.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학생독립운동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노동운동
광주지역노동운동사에서 1920년대 전반기가 노동운동의 형성기라 한다면 그 주체는 지식인과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아직 근대적 대공장이 설립되기 전이어서 노동자의 범주에 들어갈 만한 사람의 수효는 적었고 노동자의 유형도 자유노동자나 운수노동자, 인쇄노동자, 정미노동자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비교적 큰 규모의 제사업체가 설립되면서 노동운동의 조직대상이 이들 사업장의 여성노동자들로 옮겨간다.
1931년 당시 전 조선에서 섬유노동자는 전체 공업노동자의 26.3%인 17, 196명으로 집계되는데 이 중 60%가 제사여공이었다. 1930년대에는 방적업의 발흥으로 방적여공의 비중이 훨씬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초창기 제사여공들의 처지는 매우 비참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노동운동은 매우 자연발생적이고 방어적인 것이었다. 광주에서 근대적인 제사공장은 1927년에 가동되기 시작한 도시제사공장과 1930년 가동되기 시작한 종연방적 광주공장, 그리고 약림제사 공장이었다. 이들은 모두 일제가 추진하고 있던 양잠업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면서 설립되었다. 제사여공의 노동조건은 노동자들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수준이었다.
<중 략>
Ⅲ.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청년운동
1927년 11월 26일 ‘광주청년동맹’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 시작 전부터 몰려든 맹원과 방청객은 무려 2천여 명에 달하였으며, 광주경찰서 고등계주임 이하 10여 명 경관도 입회하였다. 대회를 진행할 임시집행부에는 의장 김재명, 서기 장석천, 오홍근이 선출되었다. 대회는 장석천의 취지 설명, 김재명의 경과보고, 세계정세 보고, 강령 및 규약 심의, 집행위원 선출, 안건 토의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선출된 집행부는 집행위원장에 김재명, 집행위원에는 강해석을 비롯하여 조칠성․오홍근․김기열․노석규․김창석․이동현․박학규․김용․강순명․김태오․국채진․강영석․장석천․이덕기․지창수․김명규, 검사위원에는 김흥선․최한영․강석봉 등이었다. 토의 사항에 대한 결의 가운데 주요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참고 자료
김성보(1989), 광주학생운동과 사회주의 청년·학생조직, 한국역사연구회
김영역(2001), 5·18광주민중항쟁의 초기 성격, 한국근현대사학회
박만규(2000),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그 정신, 향토문화개발협의회
윤선자(2010), 광주학생운동 이후 학생운동의 변화, 문화체육관광부
정재호(1996), 5·18광주민중항쟁에 관한 연구, 조선대학교
홍성우 외 1명(2003), 광주지역 노동운동 전개과정, 전남대학교 지역개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