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본 모습과 일제에의해 파괴된 경복궁
- 최초 등록일
- 2013.07.09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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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복궁의 조선시대의 모습은 어때했는지, 그리고 일본에 의해 어떻게 파괴가되었는지 현재의 경복궁의 복원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관하여 조사.
목차
1. 경복궁의 연표
2. 동십자각, 서십자각
3. 광화문
4. 외전-흥례문 권역
5. 외전- 근정전
6. 내전-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7. 동궁- 자선당
8. 자선당 이외의 수난을 당한 전각들
9. 경회루
10. 향원정과 경복궁의 배수체계
11. 집옥재
12. 건청궁
13. 참고문헌
본문내용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으로 동-건춘문, 서-영추문. 북-신무문과 함께 경복궁의 4개의 입구중 하나이면서 경복궁의 정문이다. 이 4문을 따라 광화문 동쪽은 동십자각이, 서쪽은 서십자각이 위치해 있고 담장의 길이는 3Km에 달하며 높이는 평균 5m, 두께는 2m에 달한다.
광화문은 일본에 의해 참혹하게 수탈을 당하게 되는데, 1926년 조선 총독부가 완공되면서 식민지배기구 앞에 조선의 정문이 있다는 것을 일본 총독 사이토는 참을 수가 없어서 광화문을 철거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일본 동양대 교수인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인의 거친 반발로 인해 건춘문 옆으로 옮겨지게 된다. 다행히 철거되진 않은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한국 전쟁으로 파괴된 광화문을 1968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복원하였으나 그것은 원래의 위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경복궁은 뒤로는 백악산, 정면으로는 관악산을 직선축으로 하여 배치되어 있고, 조선총독부는 조선 신궁을 정면으로 하여 배치되었다. 이때 복원된 광화문이 총독부와 평행하게 배치되었지 때문에 약 3.75도 정도 틀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2006년에 철거하고 2010년에야 비로소 원래의 위치를 찾게 된다.
<중 략>
고종은 1873년(고종 10년)에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을 벗어나 친정 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을 위해 건천궁을 세웠다. 건천궁은 궁의 침전 양식과 달리 양반 가옥을 응용하여 사랑채(장안당), 안재(곤녕합)과 부속 건물로 구성되었고 양반가옥의 상한선인 99칸의 2.5배인 250칸으로 지어졌다.
건립된 지 3년 뒤에 불이 나서 창덕궁으로 이어했다가 1885년에 돌아와서 1896년까지 아관파천까지 10여 년간 생활하였다. 국내 최초로 전기가 가설되었으며 1909년에 완전히 헐렸다가 1939년에 이 자리에 미술관이 들어섰고 2007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건천궁도 역시 일본에 의해 가슴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전신 시설을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 병력을 주둔하자 고종에게 거부를 당하자 일본은 비상사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참고 자료
KBS 해피선데이.E372.1박2일-서울 역사 여행 특집.120205
KBS 역사스페셜.E101.010203-영상복원 경복궁은 지금과 달랐다
MBC 경복궁의 눈물.130301
경복궁 변천과정 및 지형분석 학술조사 연구용역 문화재청
경복궁 중건이후 전각 구성의 변화 : [경복궁 재치도]와 [북궐도형]을 중심으로 – 이혜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6 인생도처 유상수 유홍준(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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