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문학] 서포 김만중의 삶과 문학

등록일 2002.12.28 한글 (hwp) | 13페이지 | 가격 2,000원

소개글

서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자료, 다양한 자료가 섭렵되어 있어 참고하기 편리할 것임...

목차

1. 생애

2. 생애구분표

3. 사상의 근간
국문의 사용
학문에 대한 관심
유교와 불교

4. 문학관

5.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6. 서포 김만중 조사를 마치며

참고자료-
정경부인 윤씨 행장 전문

본문내용

文孝公 西浦 金萬重의 본관은 光山이고 자는 重淑이다. 1637년 인조15년 2월 10일, 忠烈公 金益謙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로 피난가 있던 와중에 아버지 김익겸이 순절하고 나이 어린 만기와 만중 형제 때문에 차마 뒤따라 자결하지 못했던 어머니 윤씨가 상경할 당시 船上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이에 아명을 선생(船生)이라 하였다. 유복자로 자랐으나 어머니 윤씨의 엄하고도 자애로운 가르침 속에 대학 이전까지의 과정을 모두 어머니에게서 배웠다. 1650년(14세)에 진사초시를 합격하고 1652년에 진사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럼에도 나이가 너무 어려서 금지했던 일화가 있다. 1665년(현종 6년)에 文科에 장원급제하면서 관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成均官 典籍에 임명되었고 1666(30세)에 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다. 1667년 司憲府持平에서 文學(세자 시강원의 정5품 벼슬)로 전직하여 玉堂에 들어가 修撰을 역임하였다. 1668년 兵曹佐郞으로 전직하고 校理에서 수찬, 獻納으로 교체되었다. 1669년 吏曹佐郞으로 옮겨 외직 咸鏡北道 兵馬評事에 임명되나, 노모 곁을 떠나기 어렵다며 외직을 면직해달라 요청한다. 이 효성에 감복해 특별면직을 받게 된다. 교리에서 헌납으로, 다시 副修撰으로 옮긴다. 1670년 수찬으로 전직하였다가 병으로 면직하고 부수찬에 임명된다. 1671년 9월에 암행어사로서 신정 이계, 조위봉 등과 함께 경기 및 삼남지방의 賑政得失을 조사하기 위해 分遣된 뒤에 돌아와 부교리가 되었다. 허균에 대한 현종과의 논박으로 노여움을 사고, 관동 금성으로 유배될 처지에 놓인다. 처음에는 멀리 유배하려다가, 상신 김수흥의 신구로 인하여 관동 금성 가까운 곳으로 유배되었다. 1674년(38세) 4월에 석방되어 校理 兼司書로 서용되었다.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대에 이르러 수렴청정 반대하고 헌납을 사직한다. 應敎로 재임한다. 1675년에 戶曹參議 제수에 불응한 기록이 있다. 이 외에도 많은 벼슬 제수의 기록이 있으나 계속 물리치다가, 결국 숙종의 노여움을 사고 파직 당했다. 서용되었다가 다시 파직하기를 수 차례 반복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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