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군주권력과 국가 - 북위 효문제
- 최초 등록일
- 2013.06.09
- 최종 저작일
- 2013.05
- 10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목차
1. 강의 요약문
2. 북위 효문제는 누구인가
3. 북위 효문제의 정책
3.1. 한화 정책
3.2. 삼장제
3.3. 균전제
4. 평가
본문내용
군주와 신하 간의 공(公)과 사(私)를 논할 때 거론할 수 있는 것은 공신에 대한 군주의 대우이다. 군주가 공신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분공과 작을 통해 신하에게 우호적으로 대하는 태도가 있고, 둘째는 모함을 통해 엄형을 내리거나 불가피하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여 공신을 제거하는 방법이 있다.
그 중 북위 효문제는 공신집단에 적절한 포상을 함과 동시에 견제도 한 군주이다. 이에 앞서 북위는 북방 유목민족에 의해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에 유목사회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뮬란과 같은 만화영화나 여타 다른 매체들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농경민족에 비해 유목민족은 흉악하고 야만적이라는 인상이 남아 있지만 유목민족은 긴 역사와 나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일정한 토지에서 경작을 하여 삶을 꾸려가는 농경사회와는 달리 가축을 방목하여 살아가는 유목사회에서는 농경사회와 달리 넓은 면적의 땅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집과 집 사이의 거리가 멀어 인구 밀도도 낮았다. 그런 유목사회가 주축인 북위가 자연재해에 의해 남하가 불가피한 상황을 맞게 되어 남침을 강행해야 했다.
<중 략>
효문제는 남북조시대의 왕조 북위(北魏)의 제7대 황제이다. 성은 탁발(拓跋), 이름은 굉(宏), 묘호는 고조(高祖)이고, 현조 헌문제(獻文帝)의 아들이다. 471년 5세 때 즉위하여 490년까지 조모인 풍태후(馮太後)의 섭정 하에 있었으며, 친정(親政) 기간은 겨우 10년이었지만 북위 중흥의 영주(英主)로 일컬어지고 있다. 태후의 섭정 하에서 북위는 처음으로 관리에게 봉록(俸祿)을 지급하고, 삼장제(三長制)를 시행하여 백성의 호적을 정비하고 균전제(均田制)를 창설하였다. 균전제를 도입한 결과 농민들이 호족에게 땅을 싸게 팔아버리는 일이 줄어들게 되는 등 한(漢)의 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토지제도의 모순이 개혁되었다.
친정 후에는 율령을 개정하고, 494년 수도를 평성(平城)에서 낙양(洛陽)으로 옮기고, 대대적으로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취하여 이민족 정복자인 제실(帝室) 및 북방 여러 민족을 중국에 동화(同化)시키고, 중국 고래의 전통적 제도에 의한 정치를 하였다.
참고 자료
효문제 | 두산백과
二十二史箚記 . 券19 . 259. 武后納諫知人
二十二史箚記 . 券14 . 191. 後魏百官無祿
二十二史箚記 . 券14 . 192. 後魏刑殺太過
박한제 외, 「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 출판사, 2011, p.58~69
박한제, 호족의 중원통치구조와 북위 균전제, p26
서병국, 「이민족의 중국 통치사」, 대륙연구소 출판부, p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