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의 생애와 사상 - 1.유년시절
- 최초 등록일
- 2013.06.07
- 최종 저작일
- 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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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나의 기억은 두 살 또는 세 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나의 눈 앞에는 목사관, 정원, 세탁소, 교회, 성채, 라인 폭포, 뵈르트 공의 저택, 성당 지기의 채소밭 등이 떠오른다. 이것들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연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내 기억 속에 있는 단순한 작은 섬인 것이다. 이것들은 망망한 바다 위에 떠 있다.
한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이것은 아마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기억일 것이다. 그 때문에 그것은 아주 희미한 인상으로서 남아 있다. 나는 나무 그늘 아래, 유모차에 누워있었고, 맑은 여름날에 하늘은 푸르렀다. 나는 무엇이라고 말로 표한할 수 없는 평안함을 다시금 맛보았다. 또 다른 생각은 빵 부스러기들을 잘게 썰어 놓은 더운 우유를 숟가락으로 먹여주던 기억이며, 어떤 아주머니가 알프스를 보여준 기억과 어머니를 따라 콘스탄스 호수가에 잇는 성에 사는 그녀의 친구들을 만나러 튀르고비에 갔던 기억이 있다.
이런 생각도 난다. 외국인들, 소동들, 흥분했었던 일들. 하녀가 달려와서 폭포 밑에서 시체를 건져냈다고 소리쳤고 나는 그 시체가 보고 싶어졌었다. 나는 보고 싶어서 몰래 우리집 정원을 타고 넘어가서 세탁소로 달려갔고 세탁소 뒤편으로 비스듬히 경사진 도랑에서 피와 물이 섞여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나에게 또 다른 야릇한 흥미를 자아내게 하였다. 그때 나는 겨우 네 살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열에 들떠서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잠을 자지 못했다. 나의 아버지는 나를 품에 안고 그가 학창시절 불렀던 옛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언제나 나의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켜주곤 했다. 그 노래는 ‘절대자’를 부르는 노래였다.
나의 부모님들이 잠시 별거 상태에 들어갔던 것과 관련되어 나는 항상 사람들이 ‘사랑’이니 어쩌니 하고 말하는 것을 불신하게 되었다. ‘여성’이라고 하는 말은 자연히 나에게는 그 이후 오랫동안 불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말이 되었다. ‘아버지’라는 말은 나에게 신뢰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 되었으며 무능 역시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나의 삶의 시작에 있었던 장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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