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고종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Ⅲ. 새로운 평가의 대두
Ⅳ.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고종(高宗)은 세계적으로 역동적이던 시기에 조선이라는 동방국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은 말기 세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쇄국정책을 고수한 결과, 세계 제국주의 시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신세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고종은 바로 그때의 조선의 임금이었다.
어린나이에 보위(寶位)에 올랐던 고종에 대한 대중적인 이미지는 아버지인 대원군의 등에 업혀 있거나 부인이었던 명성왕후의 치마폭 밑에 있다가 결국은 나라를 망하게 한 왕이라는 부정적인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역사학계가 보는 눈도 이와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고종이 그 동안 무능력으로 대표되던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해 왔다는 평가가 대두되었다.
< 중 략 >
역사해석에 있어서 영웅이 시대의 산물인가, 아니면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에 대한 논제는 해묵은 논쟁일수 있다. 그것이 역사상 전화기라면 어느 것이 먼저인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재평가가 요청된 인물은 여럿 있다. 대표적인 인물인 흥선대원군, 명성왕후는 일제시대의 부정적 평가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재평가되었다. 하지만 고종은 아직도 그 둘에 비해서는 평가가 부정적이다.
1894년 농민전쟁이 일본군에 의해 진압된 이래 한국사에서 아래로부터 근대변혁의 길은 일단 좌절되었고, 남은 가능성은 위로부터 구지배층이 추진하는 점진적인 개혁의 길뿐이었다고 판단된다. 고종은 갑오 을미년간의 왕권 실추와 아관파천으로 이어진 심각한 국권위기의 상황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자신이 주도하여 근대화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러 일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과 민권운동세력의 압력이라는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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