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중세사(인물)
- 최초 등록일
- 2013.06.01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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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효문제 [孝文帝, 467~499]
내용
성 탁발(拓跋). 이름 굉(宏). 묘호(廟號) 고조(高祖). 현조 헌문제의 아들. 471년 즉위.
490년까지 조모인 풍태후(馮太后)의 섭정 하에 있었으며, 친정기간은 겨우 10년이었지만 북위 중흥의 영주로 일컬어지고 있다. 태후의 섭정 하에서 북위는 처음으로 관리에게 봉록을 지급하고, 삼장제(三長制)를 시행하여 백성의 호적을 정비하고 균전제(均田制)를 창설하였다.
친정 후에는 율령(律令)을 개정하고, 494년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洛陽)으로 옮기고, 대대적으로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취하여 이민족 정복자인 제실(帝室:鮮卑拓跋部) 및 북방 여러 민족을 중국에 동화(同化)시키고, 중국 고래의 전통적 제도에 의한 정치를 하였다.
그는 호어(胡語) ·호복(胡服)을 금하고, 또한 황족의 성씨인 탁발을 원씨(元氏)로 고치는 등 북방민족의 성을 중국식으로 고친 다음, 호(胡) ·한(漢)을 통틀어 씨종의 계등(階等)을 정해서 관료로 채용하고, 상호간의 통혼(通婚)을 장려하였다. 이리하여 제실(帝室) 밑에 한인과 북방민족의 귀족이 공존(共存)하는 북조 귀족제도가 성립되고, 북위는 문화정치의 융성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후년에 북방민족 귀족의 강건한 기풍의 상실, 북방민족 하급군인의 빈천화(貧賤化)의 원인이 되어, 북위 말에 북방민족계 군사의 반란을 초래하였다.
<중 략>
자(字) 중달(仲達).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수(隋)나라 양제(煬帝) 때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관계에 나갔으나, 양제가 그의 재능을 시기하여 암살하려 하였다. 당나라의 태종(太宗)에게 중용되어 국자박사(國子博士)를 거쳐 국자감의 좨주(祭酒) ·동궁시강(東宮侍講) 등을 지내고, 태종의 신임을 받았다. 문장 ·천문 ·수학에 능통하였으며, 위징(魏徵)과 함께 《수서(隋書)》를 편찬하였다. 왕명에 따라 고증학자 안사고(顔師古) 등과 더불어 오경(五經) 해석의 통일을 시도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 170권을 편찬하였다.
참고 자료
화강장국호(구성희 외2 옮김), ≪아주 특별한 중국사 이야기≫, 신서원, 2008.
김태승, ≪동양사의 기초지식≫, 신서원, 1991.
김선빈 옮김, ≪아시아 역사와 문화 2≫, 신서원, 2006.
신채식, ≪동양사통론≫, 삼영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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