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발해의 고분과 도성
- 최초 등록일
- 2002.12.15
- 최종 저작일
- 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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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발해
Ⅱ. 발해의 도성
1. 상경용천부
2. 중경현덕부
3. 동경용원부
4. 남경남해부
5. 서경압록부
Ⅲ. 고분의 종류
1. 돌방무덤(석실분)
2. 돌덧널무덤(석곽묘)
3. 돌널무덤(석관묘)
4. 널무덤
5. 벽돌무덤(전축분)
Ⅳ. 발해의 고분
1. 육정산 고분군
2. 정혜공주
본문내용
Ⅰ. 발해
발해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과 《신당서(新唐書)》 발해 전에 전하는데, 모두 발해를 말갈의 나라라고 기록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발해를 신라와 이웃한 나라로 여겼을 뿐 한국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발해사를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 이래 그것을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최근에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병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000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뒤의 고왕)도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과 함께 요서 지방의 영주(營州:조양)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과 손만영이 영주도독 조홰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