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항쟁(대몽항쟁, 몽고침입)의 의미, 몽골항쟁(대몽항쟁, 몽고침입)의 배경, 몽골항쟁(대몽항쟁, 몽고침입)의 침략과정, 몽골항쟁(대몽항쟁, 몽고침입)의 몽고군, 강화(講和)
- 최초 등록일
- 2013.04.15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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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몽골항쟁(대몽항쟁, 몽고침입)의 의미
Ⅲ. 몽골항쟁(대몽항쟁, 몽고침입)의 배경
Ⅳ. 몽골항쟁(대몽항쟁, 몽고침입)의 침략과정
1. 전기
2. 후기
Ⅴ. 몽골항쟁(대몽항쟁, 몽고침입)의 몽고군
Ⅵ. 몽골항쟁(대몽항쟁, 몽고침입)의 강화(講和)
1. 강화의 성립 과정
1) 고종 46년 강화 성립
2) 1268년(원종 9) 몽고에서 ‘6사(事)’ 요구
3) 무신정권 종식
4) 1274년(원종 15) 왕실 혼인
5) 1278년(충렬 4) 충렬왕의 친조 외교
2. 고려·원 관계의 구조
3. 당시인들의 대원의식
4. 고려후기 역사서술에 대한 평가
Ⅶ.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칭기스칸이 만들어 가는 세상의 질서에 동참하는 일, 거기서 맛보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그들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일깨워주고 그들 스스로의 삶을 값지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후회 없이 말을 달렸다. 그리고 그들은 질주가 가로막힐 때마다 격렬한 전투를 피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것을 소유하려는 자들과, 소유에의 욕망을 잠재우려는 자들간의 싸움에서 승패는 언제나 불을 보듯 뻔했다. 유목민들의 승리였다.
때로는 몇 십 만의 부족이 순식간에 도륙당하기도 했지만, 유목민이 승리한 대륙을 따라 역참제가 신설되었으며, 물샐 틈 없이 칸막이되어 있던 문명과 문명간의 경계들이 허물어졌다. 동양과 서양이 통일되고, 지상의 먼 나라들간에 소통이 시작되던 그 대변혁의 시대. 유목민들이 칭기스칸의 깃발 아래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지고 제국 건설의 열기 속에 열정을 불태웠던 결과에 대하여 인류는 오랫동안 침묵해 왔다.
<중 략>
징기스칸에 의해 시작된 중국의 통일과업은 마침내 그의 손자 쿠빌라이(1215-1294)에 의해 완성됐다. 1279년 중국 남부를 장악했던 한족 왕조인 남송을 무찌르고, 몽고제국이 중국을 재통일시켰던 것이다. 몽고족은 남송을 격파하기에 앞서 1271년 元(원)을 세웠다. 지금의 북경에 大都(대도)라는 명칭의 수도를 세우고 본격적인 중국 지배에 들어갔다. 원은 1368년 명에 의해 붕괴될 때까지 중국을 약 1세기에 거쳐 통치했다. 몽고족에 의한 중국의 재통일은 중국사에 몇 가지 의미를 부여했다. 우선 끊임없는 이민족 침입으로 야기된 장기간의 전란이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중국의 사회와 경제가 모처럼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둘째, 북으로는 북극해까지, 남으로는 海南島(해남도)까지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또한 몽고족은 중국이 다민족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참고 자료
강재광, 몽고침입에 대한 최씨정권의 외교적 대응, 서강대학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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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범, 몽고의 침입과 고려민중의 반항, 동국대학교 북한학연구소, 1975
유창형, 몽고의 침입과 강도, 인하공업전문대학, 1985
한우근, 몽고의 침략에 대한 항쟁,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