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몽항쟁(몽골항쟁, 몽고침입)의 중요성, 대몽항쟁(몽골항쟁, 몽고침입)의 원인, 대몽항쟁(몽골항쟁, 몽고침입)의 전개과정, 대몽항쟁(몽골항쟁, 몽고침입)의 강화천도, 민란(民亂)
- 최초 등록일
- 2013.04.15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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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대몽항쟁(몽골항쟁, 몽고침입)의 중요성
Ⅲ. 대몽항쟁(몽골항쟁, 몽고침입)의 원인
Ⅳ. 대몽항쟁(몽골항쟁, 몽고침입)의 전개과정
Ⅴ. 대몽항쟁(몽골항쟁, 몽고침입)의 강화천도
Ⅵ. 대몽항쟁(몽골항쟁, 몽고침입)의 민란(民亂)
1. 각지에서 몽고군과 싸움
2. 전쟁 중 민란의 발생
1) 고종 43년 2월
2) 고종 19년 정월
3) 고종 24년 정월
4) 고종 45년 10월
Ⅶ.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몽고침략 이전 고려인들의 식생활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이 아니면 양과 돼지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에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장위를 다 끊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 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졸렬함이 이와 같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당시 고려는 육식을 즐기지 아니하고, 도축법도 발달하지 못하여 잡은 고기의 맛도 형편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고려가 적극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교 교리에 의거한 정책을 시행한 것이 한 원인이라 할 수 있으며, 서긍도 이를 지적하고 있다. 고려사에는 수차례에 걸쳐 역대 왕들이 불교교리에 의거하여 살생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기사가 전해지고 있다.
숙종은
“만물이 발육 생장할 때가 되면 새끼 치고 알 낳는 짐승을 죽이지 말라는 것은 예기에 명시되어 있는 법전이며 옛날 어진 임금들의 좋은 정책이었다. 그런데 지금 각 도 수령은 법령을 잘 준수하는 자가 드물다. 혹은 반찬감을 바침으로써 상부의 상을 받기 위하여 혹은 사신을 후히 대접함으로써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사냥을 무시로 하고 혹은 농민들이 화전을 개간하다가 생물을 연소시키는 일도 있다. 이는 때를 맞추어 생물을 기르는 도리에 어그러지고 천지의 화기를 손상하는 것으로 되니 이런 행위를 일체 금지할 것이며 명령을 위반하는 자는 벌에 처할 것이다.”
라고 하여 번식기에 동물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였고, 원종은
“나는 인자한 마음을 새와 짐승들에게까지 미칠 것을 바라는 바이다. 지금은 한창 봄철이라 사냥을 한다면 새와 짐승들이 알을 낳지 못하고 새끼를 치지 못 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생명 있는 것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 뜻을 알고 상납하는 음식물 중에 육류를 넣지 말게 하라”
고 하여 살생을 금지할 뿐 아니라 솔선수범하여 육식을 절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나라의 통치자가 동물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고 앞장서서 육식을 절제하니 자연 고기를 얻을 목적으로 가축을 기르는 것도 등한시 하였을 것은 자명한 일이고, 육류의 공급은 몹시 적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일부 상류층에서나 육식을 즐겼음이 高麗圖經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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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2004), 고려의 강화 천도와 대몽항쟁의 해양적 성격, 인천가톨릭대학교
윤용혁(2003), 고려의 대몽항쟁, '단계적으로 발전해 간 항쟁역량', 내일을 여는 역사
전인찬(1985), 삼별초의 대몽항쟁에 대한 고찰, 동아대학교
최종석(2008), 대몽항쟁·원간섭기 산성해도입보책의 시행과 치소성 위상의 변화, 진단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