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전후 조선내부의 대응 - 집권층의 대응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3.03.31
- 최종 저작일
- 20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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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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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대한제국의 외교정책과 일본과의 교섭
3. 용암포 사건 발생 이후 대한제국의 대응
4. 전시중립선언과 한일의정서의 체결
5.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1904~1905년 러일전쟁이 종결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재편성되었다. 19세기 말 이래 이 지역의 국제정치에서 수정주의적 정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해온 러시아가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이 재편성이 이 지역의 세력 균형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는 의미이다. 구대열, 『한국국제관계사연구』1, 역사비평사, 1995, p85.
이러한 변화의 양상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우월적 권리를 열강들이 승인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것은 한반도 내부의 입장에서 보면, 식민지로 귀결하는 ‘비극적’ 과정이었다.
동아시아 국제정치 측면에서 파악하면, 러시아와 일본은 주로 한반도와 만주를 대상으로 협상하고 충돌했다. 1896년 고무라-웨베르 각서, 야마가타-로바노프 의정서, 1898년 로젠-니시 협정을 통해 兩國은 충돌보다는 현상 유지의 정책을 시행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의화단 사건의 처리과정을 거치며 성격이 변화된다. 의화단 사건의 해결을 위해 열강의 군사력이 직접 중국에 진출하고, 러시아와 일본 역시 직접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두 국가의 충돌은 전쟁에 근접한다. 이에 따라 러시아와 일본 내부 논의에서 협상파의 입지는 줄어들고 강경파가 득세한다.
위와 같은 국제질서의 변화에 조응하여 조선 내부에서 다양한 대응이 시도되었다. 우선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집권층의 외교정책에 반영되어 나타난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 외세의 영향에 따라 국가 존망이 결정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열강의 대외정책은 대한제국 국내정치의 중요한 안건이었다. 당시 대한제국 집권층은 한반도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러시아와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을 중심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러일전쟁 이전까지 대한제국의 외교정책은 열강 사이의 세력 균형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간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의 승리로 전쟁이 마감되면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영향력에 강하게규정된다.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대한제국 집권층 정책 결정은 사실상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이후의 집권층은 일본의 영향력을 수용하는 정파와 그것을 거부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정파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기 지식인들의 대응은 東洋主義 논리 이하의 연구사 정리에 등장하는 논문은 ‘동양주의’ 개념을 ‘아시아연대론’, ‘동양삼국공영론’, ‘동아시아 제휴론’의 논리로 연결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각각의 개념을 엄밀하게 나누어 연관성을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이번 발표의 범위를 벗어나는 관계로 추후 과제에 넘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