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남자, 광해) 연산군과 광해군의 일대기의 공통점과 차이점
- 최초 등록일
- 2013.03.31
- 최종 저작일
-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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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주제 – 연산군과 광해군의 일생의 공통점을 설명한다. – 불우한 성장배경 속에서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두 임금
처음 – 연산군의 가정환경
중간 – 광해군의 가정환경
끝 – 환경은 같지만 대처는 달랐던 두 사람의 이야기.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
본문내용
출생과 성장
- 성종(연산군의 아버지)에 극진한 총애를 받아 생후 1년만에 세자로 책봉
- 후궁이 많았던 부왕성종과폐비 윤씨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고, 윤씨가 성종의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을 기회 삼아 후궁들과인수대비는 윤씨를 왕비에서 폐하고 궁궐에서 축출한다. 그 후 정현 왕후(제2대 계비)의 아들로 자람
-소년기에 자신이 정현 왕후의 친아들이 아니며 폐비 윤씨가 폐출된 것임 알게 됨.
- 특이한 행동을 보임
연산군의 가계도
즉위이후
즉위 이듬해부터 어머니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권시키는 일을 추진
그러나사림에서는 `사후 백년간 폐비 윤씨 문제는 논외에 부친다`는 선왕의 유지(성종의 유언)를 이유로 들며 폐비 복권을 반대.
이 때문에 감정이 악화된 연산군은 사림파의 제거를 추진 + 왕권 강화 목적.
무오사화
일어난 이유 자신의 왕위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림을 견제 + 왕권 강화 목적
일반적인 사화와는 달리 사형이 적은 비율로 경고의 의미가 짙음을 알 수 있음
<중 략>
조선 최초의 반정(反正)으로 폐위
신하들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고 성종 둘째 아들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왕위에 추대됨.
장녹수등 그의 후궁들은한성부종로, 남대문 등에서 투석사형 당하였으며 연산군의 어린 아들들도 반정군에 의해 살해당함.
강화군 교동도에 유배된 지 2개월 뒤에 역질, 화병 등의 후유증으로 병사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30세였음.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