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의 16국사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13.03.26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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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송광사에 대하여
1. 송광사의 유래
2. 송광사
3. 현존하는 송광사의 건물
Ⅱ. 송광사의 16국사
Ⅲ. 16국사의 생애와 활동사항
본문내용
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사찰로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송광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있다. 구전해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산이 장차 `18공`이 배출되어 불법을 널리 펼 훌륭한 장소`이기 때문에 송광이라 하였다고 한다 소나무`송`자를 `18공`이라고 파자하고 `광`자를 불법광포의 뜻으로 해석한 데서 유래했습니다. 또, 다른 전설에는 보조국사가 이 절터를 잡을 때 나복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국사전의 뒷등에 떨어져 앉았으므로 이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하여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라고 풀었다.
<중 략>
1245년(고종 32) 최우가 선원사(禪源社)를 창건하고 낙성회를 벌일 때 그곳의 주맹(主盟:법회의 책임자)이 되기를 청하였으므로 이듬해 승려 200명을 이끌고 강화도에 들어가 선원사에 머물렀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왕공(王公)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으나 자주 산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1252년 청진국사가 입적하자 왕으로부터 조계산 수선사의 제4세 사주(社主)로 임명받아 그 때부터 수선사에서 선풍(禪風)을 떨쳤고, 혜심이 머물렀던 단속사(斷俗寺)를 감독하는 도감(都監)으로 임명받았다. 1256년 천영(天英)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거하였으나 다시 고종의 부름을 받고 자운사(慈雲寺)로 가서 1259년 왕사가 되었다.
<중 략>
1428년 7월 11일 병을 얻었으나 평소의 의식을 그대로 행하다가 21일 인시(寅時)에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유언에 따라 유골을 거두어 침실에 안치하였는데, 이듬해 유골에서 사리(舍利)가 나왔다. 그 뒤 여러 차례를 두고 사리가 분신(分身)한 것을 합해서 78개를 얻어 백동함(白銅函)에 넣어 송광사 북쪽 언덕 청진암(淸眞庵)터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송광사를 중창한 공로와 그 도력으로 송광사 16국사의 열(列)에 참여하게 되었다. 제자로는 신찬(信贊)·혜성(惠性)·상제(尙濟)·홍인(洪仁)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고봉법장가집(高峰法藏歌集)』이 있다.
참고 자료
「보조국사비명」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이능화, 신문관, 1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