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그는 개혁정치가인가 수구적 쇄국주의자인가
- 최초 등록일
- 2013.03.20
- 최종 저작일
-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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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개혁정치가인가 아니면 수구적 쇄국주의자인가를 따져 보기에 앞서 흥선대원군의 등장과 그 시대적 배경부터 살펴보고 가야 될 것 같다.
이 당시 세계적 흐름은 대항해시대이후 서양세력들이 그들의 종교를 앞세우고 뛰어난 기술과 힘을 바탕으로 수교, 통상 등을 요구하며 식민지 국가를 늘려가고 있었다.
일본은 이를 빨리 받아들여 메이지 유신을 감행하여 힘을 키우고 있었고 청은 서양세력과의 힘겨루기에 패하여 야금야금 잠식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서 조선은 19세기 초 세도정치가 시작 되면서 왕권은 약화되었고 국정의 문란은 극에 달했다. 매관매직(賣官賣職) 등이 성행하고 인사행정이 문란해졌으며 그로인해 삼정(三政)이 문란해져 농민의 피해는 극도에 달했다. 이에 지방 차별과 조정의 부패에 항거하여 일으킨 홍경래의 난에 이어 1863년 삼남지방의 농민항쟁은 위협적이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최제우가 동학이라는 종교를 만들게 되었고 사회의 불안과 혼란 속에서 민중은 종교에 의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 동학의 교세는 날로 커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철종이 재위 14년(1863년) 후사 없이 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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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쇄국정책을 표방한 대원군과 평화적인 교섭과 통상개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서양세력들은 무력을 통하여 통상관계를 맺으려 했다. 이에 프랑스와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문제가 되어 1871년에 미국과의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 속에서 그들의 문화재 약탈이나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등은 서양세력에 대한 증오심과 의구심을 더욱 키우게 되었고 척사위정과 쇄국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는 당연한 계기였다. 외세가 무력을 앞세워 불신의 행동을 저지르면 당연히 반감과 저항의지가 생기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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