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4.3사건의전개과정
- 최초 등록일
- 2013.03.10
- 최종 저작일
- 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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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제주도 4.3 사건의 원인
2. 제주도 4.3 사건의 경과
3. 제주도 4.3 사건의 결말과 결과
본문내용
1. 제주도 4.3 사건의 원인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기 까지 그 배경에는 제주도가 일본이 항복한 이후부터 1945년 9월 28일 미군이 진주할 때 까지 한달 반 이상 치안 공백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틈을 타서 좌익계의 선전 선동으로 좌익계가 압도를 했다. 그 좌익계로는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있었다.
그러던 중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채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본 시위 군중들은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며 야유를 하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는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 발포해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미군정이 시위대에 책임을 돌리자 민심은 들끓기 시작했고 남로당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삐라 붙이는 일과 사상자 구호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 후 3월 10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발생하여 제주도의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행정기관 대부분인 23개 기관, 105개의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등 제주 직장인 95%에 달하는 4만 여명이 참여하였고, 심지어 제주 경찰의 20%도 파업에 참여하였다.
< 중 략 >
1949년 3월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오라리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이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제주 4.3 사건의 결과로는 2만5천~3만명의 학살 피해자를 냈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p383~p384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이다.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사망자만 14,000명 에 달한다.
참고 자료
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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