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금성산성][부소산성][수원화성][가산산성][나성][왜성]만리장성, 금성산성, 부소산성, 수원화성, 가산산성, 나성, 왜성 분석(만리장성, 금성산성, 부소산성)
- 최초 등록일
- 2013.02.22
- 최종 저작일
- 2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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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만리장성][금성산성][부소산성][수원화성][가산산성][나성][왜성]만리장성, 금성산성, 부소산성, 수원화성, 가산산성, 나성, 왜성 분석(만리장성, 금성산성, 부소산성)
목차
Ⅰ. 만리장성
Ⅱ. 금성산성
Ⅲ. 부소산성
Ⅳ. 수원화성
Ⅴ. 가산산성
Ⅵ. 나성
Ⅶ. 왜성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중국 역대 왕조가 변경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대성벽으로써 보하이만(渤海灣)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약 6,400㎞(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이다. 춘추시대 제(齊)가 영토방위를 위하여 국경에 쌓은 것이 장성의 기원이며 전국시대의 여러 나라도 이에 따랐다.
진(秦) 시황제(始皇帝)는 중국 통일(BC 221) 후 흉노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간쑤성(甘肅省) 남부로부터 북으로, 황하강(黃河江)의 대굴곡부(大屈曲部)의 북쪽을 따라 동으로 뻗어나가, 둥베이(東北) 지구의 랴오허강(遼河) 하류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는데, 절반 이상은 전국시대의 연(燕)·조(趙) 등이 쌓은 장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근년에 이 장성의 동부 유지(遺址)가 둥베이 지구에서 발견되고 있다.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흉노로부터 지키려고 장성을 란저우(蘭州) 북방에서 서쪽으로 둔황(敦煌) 서편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연장하였다.
<중 략>
왜성이란 임진정유재란(1592-98년)때 한반도를 침략한 히데요시의 군대가 한반도에 일본식 축성 기술로 쌓은 성곽군을 말하는 것이다. 도요토미는 1592년 3월의 朱印狀에서 “高麗之地, 何之浦浦へも一度に令著岸, 陣取をかため, 普請丈夫に可申付候”라 명령한 것처럼 침략 당초부터 축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그 후에도 필요에 따라 축성 명령을 내리고 있다.이렇게 만들어진 왜성은 일본군이 침공한 전 지역에 걸쳐 분포되고 있다. 당시 부산과 평양 간에 보급?연락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쌓은 10여 곳의 연계성(繫ぎの城 또는 傳いの城)과 각부대의 주둔지에 왜성이 20여 곳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임시적인 방편으로 급조한 것으로 그 유구는 현재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어 그 소재와 규모 등을 확인할 수 없는 실정이다.
참고 자료
김영하 - 가산산성의 연구, 경북대학교, 1972
담양군 외 1명 - 담양 금성산성, 담양군 호남문화재연구원, 2010
신안식 - 고려시대 개경의 나성, 명지사학회, 2000
이용호 - 수원화성의 보존과 향후 계획, 대한건축학회, 2009
이재돈 - 만리장성, 대한민국해군, 2003
정광용 외 2명 - 부소산성 금속유물의 제작기술 연구, 충청문화재연구원,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