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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2.22
- 최종 저작일
- 2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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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임오군란의 원인
Ⅲ. 임오군란의 전개
Ⅳ. 임오군란의 결과
Ⅴ. 임오군란과 강화도조약
Ⅵ. 임오군란과 일본의 정책
Ⅶ. 임오군란의 한계점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1876년 12월 박규수 사후에 개화파는 점차 의견과 노선의 대립이 생겨 온건 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두 파로 나눠지게 되었다. 온건개화파는 조선사회가 점진적으로 개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온건노선을 취하였고, 급진개화파는 조선사회가 적극적이고도 급진적인 방향으로 개화되어야 한다는 급진노선을 따르고 있었다. 당시 執權勢力이었던 전자는 중국의 자강운동(양무운동) 같은 방식을 따르고 하였고, 후자는 주로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따르려 하였다. 이에 급진개화파는 자파를 개화당 혹은 독립당으로 부르고 온건개화파를 사대당 혹은 수구당이라 불러 각기 차별성을 부여하였다. 온건개화파에 속한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이조연 등으로 개항 이후 나라의 중요정책을 결정하던 인물들이었다. 급진개화파의 인물들로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있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동지규합에 힘쓴 결과 유혁로, 변로, 이동인 등 양반, 중인, 군인, 상민, 승려 등 다양한 신분 출신의 인물들을 개화당에 합류시킬 수 있었다. 또한 정계의 핵심에 통리기무아문 당상 이재긍과 민비의 친조카 민영익 그리고 이조참판 홍영식 등이 여기에 가세함으로써 開化政策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임오군란 이후 다시 집권한 민씨 躑躅은 특별한 정견도 없이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데 급구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自主獨立이 크게 침해되고 있었다. 반면 청은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킨 상태에서 민씨 정권을 앞세워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종주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궁성을 장악하여 크고 작은 정사를 일일이 간섭하였다. 이에 따라 자주근대화를 표방하고 개화당 요인들이 추진하던 개화정책은 집권파 인사들에게는 위험시될 수밖에 없었고, 개화당은 곧 경계의 대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집권 척촉 세력과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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