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수용에 따른 조선후기 사회, 문화적 변화
- 최초 등록일
- 2012.12.23
- 최종 저작일
- 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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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후기에 천주교의 수용에 따른 사회, 문화적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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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시대는 17세기를 기점으로 하여 가부장적 성리학 사회질서가 정착되게 된다. 혼인제도의 경우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남귀여가(男歸女家) : 남자가 신부가 될 여자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른 뒤 그대로 처가에서 살다가 자녀를 낳아 자녀가 성장하면 본가로 돌아오는 한국 고유의 혼인 풍속의 하나.
에서 친영제(親營製) 친영제도(親營製度) : 혼인 육례(六禮)의 하나로,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예식을 올리고 신부를 맞아오는 예를 뜻한다. 지금의 결혼제도처럼 부인이 남편 집에 들어와서 사는 것이다.
로, 상속도 장자, 차자, 딸의 구별 없이 고루 나누어 주는 균분에서 장자 위주의 상속으로, 제사도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지내는 윤회봉사(輪廻奉祀)에서 장자 단독 봉사로 바뀌게 되었다. 이처럼 성리학적 사회가 강화되면서 여성, 노비 등의 사회적 약자의 위치는 더욱 열악해졌고 정치적 약자 또한 발붙일 곳이 없어지게 되었다.
<중 략>
이러한 사회, 문화적 변혁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에서도 나타났다. 그 변화는 생활적인 측면에서 금욕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종교적 이유나 그 밖의 여러 이유에서 금욕을 실천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있어왔다. 그러나 이전의 금욕적 실천이란 어디까지나 일부 특정한 사람들만의 일이었고, 대게 일정 목적을 위해 한시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와 달리 천주교에서 금욕적 실천은 많은 신자들이 행한 일반적 실천이었으며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지속적 실천이었다.
금식이나 금육, 절식 같은 음식절제가 조선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행한 기본적인 금욕적 실천이었다. 교회가 정한 날 최소한의 음식 절제를 하는 것은 모든 신자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자들 중 더 철저하게 음식 절제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이들은 평생 고기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또 어떤 이들은 형편없는 음식만 먹었다. 이러한 행동들은 신자의 기본 의무를 뛰어넘어 개인의 자발적 의지에 따른 실천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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