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과 민중
- 최초 등록일
- 2012.12.20
- 최종 저작일
- 20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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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장개석이 실패할수 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는 `민중`에게 있다고 보고 서술하였음.
목차
1. 여는 글
2. 국민정부의 강제부담
(1) 징병과 민중
(2) 조세부담과 민중
3. 공산군과 민중
4. 닫는 글
본문내용
1. 여는 글
1911년 이후 중국인들에게 있어 국가적 통합은 가장 절실한 요구였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과 군벌의 등장은 중국의 존망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하였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주적이며 통일된 국가 건설은 그 어떤 가치 추구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국가적 통합을 이룩하려는 시도는 여러 세력에 의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손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손문 사후, 장개석은 국민정부의 실권자가 되었고 1926년 7월 국민혁명군 총사령으로서 혁명군을 이끌고 북벌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군벌타도와 국토의 통일, 그리고 중국사상 첫 근대 정부인 남경 국민정부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장개석은 후에 모택동과의 대결에서 패배를 하게 되고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장개석이 공산당에게 패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장개석과 군벌체제의 관계, 이념의 통일 부재, 국민당의 부패 등등이 바로 그 이유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당시 일본과의 전쟁이 일어났고 경제도 그와 함께 파탄의 상태였지만 장개석은 민중의 힘을 정확히 알지 못하였고, 민중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국민정부가 민중들에게 어떤 이유로 신뢰를 잃어 가는지 그 과정과 공산당과 민중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 장개석의 패배원인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국민정부의 강제부담
(1) 징병과 민중
1941년경이 되면 징병적령남성의 보유수가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아들 한 사람 이상을 아직도 집에 데리고 있는 집안 수는 줄어들었다. 돈 있는 사람은 면제받는 길을 알게 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은 그저 도망치거나, 꾀병을 앓거나, 자기 신체에 스스로 상해를 입혔다. 이리하여 병사를 강제로 끌어오는 일이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정식 징병제도가 부적절한 것으로 밝혀지자, 그 지방전선에 주둔한 군대에서는 필요로 하는 만큼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서 ‘강제 모병대’를 파견하였다. 그 결과 빈민들은 전면적으로 납치하게 되었다. 1944년에 웨드 마이어 장군이 장개석에게 보낸 한 문서에 보면 그 방식의 실제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참고 자료
로이드 E. 이스트만 저, 민두기 역,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지식산업사, 1986,
레이 황 저, 구범진 역, 『장제스蔣介石 일기를 읽다』, 푸른역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