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과 중세서양의 정치발전
- 최초 등록일
- 2012.12.20
- 최종 저작일
- 20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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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과 중세서양의 정치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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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1세기에 이루어진 중세사회의 전반적인 안정을 배경으로 중세유럽은 밖으로는 이슬람세력에 대한 반격과 팽창을 시도하고 안으로는 봉건적인 농촌경제와 길드적인 도시경제가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사회경제적 발전을 바탕으로 12, 13세기에는 그리스도교적이며 봉건적인 중세문화의 꽃이 만발하였다. 그러나 14세기로부터 15세기에 걸쳐 중세유럽의 봉건사회는 붕괴 내지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13세기 까지 성장을 계속하던 봉건경제가 전반적으로 위축되기 시작하고, 심각한 기근, 흑사병, 장기간에 걸친 대전쟁, 농민반란 등이 발생하여 영주제는 위기에 당면하고 장원제도가 붕괴하게 된다. 도시에서도 부유한 상인과 금융가들이 폐쇄적인 도시귀족으로 변함으로써 도시의 하층민 내지 노동자의 폭동과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길드적인 도시경제의 틀이 흔들리게 되었다.
정치면에서는 봉토를 매개로 한 주종관계가 깨어지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집권적인 통일국가의 형성이 촉진되지만, 백년전쟁이나 장미전쟁과 같은 큰 전쟁의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정치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먼저 백년전쟁의 배경,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정치발전이 각각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중세 말의 유럽정치사에 있어 가장 크고 중요했던 사건은 백년전쟁이었다. 백년전쟁의 주된 원인의 하나는 프랑스에서의 발루아왕조의 성립과 이에 관련된 왕위계승권 문제였다. 카페왕조가 프랑스 왕위를 오래 누리면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대대로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나 필립 4세의 후계자는 불행하게도 왕자를 갖지 못하였다. 장남인 루이 19세와 그의 동생 필립 5세는 딸만 있었고, 막내인 샤를 6세 역시 왕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논의 끝에 필립 4세의 동생의 아들인 필립6세가 왕위에 오르고 카페왕조 대신 발루아왕조가 성립하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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