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니테 다비타시옹
- 최초 등록일
- 2012.12.15
- 최종 저작일
-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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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모듈로 시스템도입으로 바라본 위니테 다비타시옹, 근대 도시계획으로 바라본 위니테 다비타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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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건축학과를 진학하면서 제일 처음 듣고 만나는 건축가가 바로 르꼬르뷔제 일 것이다. 하지만 저학년때 단순히 이름과 작품정도만 알고 있었지 르꼬르뷔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고학년이 되어 그때 시대상황을 함께 읽어가다 보면서 르꼬르뷔제의 업적을 조금 이나마 이해할수 있었다.
르 꼬르뷔제는 예술가이며 사상가였다. 그는 30대에 파리에서 순수파 회화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50대인 1939년 피레네 산맥에서 OZON을 조각하였다. 그는 내면에는 이상들(ideals)을 통합하는 천부적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결정화된 것이 바로 모듈러이다.
그는 모듈러는 50대 후반에 발명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일반 스케일 대신에 모듈러 띠를 애용하였다. 그의 창조적인 후기 작품은 모듈러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는 “롱샹 성당은 수(數)의 열매다”라고 자신있게 말하였다.
그는 회화에서 도시계획까지 모든 조형 예술분야에 걸쳐 모듈러를 적용하였으며, 건축 내에서도 골조와 내부 공간의 안목치수, 가구, 내외장재 등 모든 치쉐 적용하였다. 그는 모듈러가 이제 인치-피트 체계, 미터 체계를 대치하는 신 시대의 보편적인 치수 체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중 략>
자연과 공간을 인간에게 돌려주고 속도를 회복해 살기 좋고 경쟁력 있는 도시를 꿈꾼 것이다.
지은지 50년이 부쩍 넘어 오래되었지만 그곳에 오히려 프리미엄이 붙은 이유는 건축사적인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현재 한국도시와 건축물은 삶과 거주의 고민보다는 부동산 재화로써의 가치가 극대화 되었다. 실폐한 근대 도시 계획일지라도 그가 했던 시대상의 많은 고민은 한국정부와 부동산 건축업자들이 만들어낸 한국도시와 결과는 같다고 할지라도 아마 그 출발부터가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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