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민정 문서
- 최초 등록일
- 2012.12.05
- 최종 저작일
- 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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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 민정 문서
목차
(1) 신라 민정문서(촌락문서)란?
(2) 내용
(3) 당시의 사회상
본문내용
(1) 신라 민정문서(촌락문서)란?
이 문서는 民政文書라고 불리는 외에 村落文書, 新羅國官文書, 均田成冊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다. 1933년 일본 東大寺의 正倉院에 소장된 13매의 經帙 가운데 파손된 華嚴經論의 冊匣을 수리할 때 그 내부의 포심에 덧붙인 휴지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문서 작성 연대에 대해서는 755년설, 815년설, 875년설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이 문서는 촬영 후 원상태로 도로 붙여 두었기 때문에 지금은 사진본만 볼 수 있다. 楷書體 62행으로 된 이 문서는 當縣 沙害漸村, 當縣 薩下知村, 失名村, 西原京 □□□村의 4개 촌락에 대해 촌락의 둘레, 孔烟과 計烟의 수, 9등호제에 의한 각 등급의 烟의 수를 비롯해, 연령별․남여별 인구수와 3년 동안의 증감, 牛馬의 수와 田․沓․麻田의 면적, 뽕나무와 잣나무 등의 그루 수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어, 통일신라 촌락의 경제상황 및 국가의 수취기반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2) 내용
1) 촌명
: 사해점촌, 살하지촌, □촌, 서원경 □촌
2) 촌역
이 문서의 기재는 촌을 단위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특색이 있다. 촌은 10-15호로 이루어져 각기 다른 크기의 촌역이 있었는데, 이 점에서는 자연촌락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4개의 촌락 가운데에서 1개의 촌락은 결락으로 알 수가 없지만, 나머지 3개의 촌락은 각기 일정한 촌역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사해점촌은 둘레가 5,725보, 살하지촌은 1만 2830보,그리고 서원경 모촌은 4,800보였다. 이 크기는 당시 수도였던 경주의 면적이 1만 2186보로 계산되는 것에 견주어서 대단히 큰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촌의 구역면적이 큰 것은 문서에 보이는 촌역이 단순히 주거지와 경작지뿐만 아니라 산림까지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촌역에 포함된 산림은 촌락민들에 의해 우마의 방목, 채초(採草), 채목(採木) 등으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1步=6尺, 1척=30cm)
참고 자료
변태섭, <한국사통론>, 삼영사, 2001
이인철, <新羅村落社會史硏究>, 일지사, 1996
박시형, <조선토지제도>, 신서원,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