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민사에 관해..
- 최초 등록일
- 2002.12.04
- 최종 저작일
- 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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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충민사의 내력
@석천사
본문내용
* 충민사 (忠(충)祠(사)堂(당))*
국내 최초의 충무공 사당인 충민사는 여수 버스터미널에서 국도 17호선을 따라 시내방향으
로 조금 내려가면 도로가 두 갈래로 나뉘어 진다. 이 지역에서는 이 도로의 좌측길을 [윗
길],우측길을 [아랫길]이라고 부른다. 충민사는 좌측길(윗길)로 약1.5km 쯤 가면 도로정상인
중앙여고 앞이 나오는데 중앙여고 앞에서 좌회전을 하여 약 500m 쯤 가면 좌측으로 현암도
서관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우측으로 [하마비]가 나타난다.
[하마비]란 그곳을 지나는 사람이 아무리 지체가 높다하여도 말에서 내려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충민사 옆으로는 석천사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충민사는 국가사적 제381호로 지정
된 사당으로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 전에 지은 충무공사당 제1호이다
자운스님은 임란이 일어날 당시 흥국사에 머물던 승려였다. 그는 충무공과 뜻을 같이하여
왜적의 침략에 대비 흥국사와 그 주변의 암자에서 불법의 참뜻을 깨닫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닦던 승려 300여 명으로 의승수군을 결성하고 그 대장이 되었다. 의승수군은 성을 쌓거나
고치는 일, 병사들의 훈련을 돕는 큰집을 짓는 일, 배를 새로 만드는 일 등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였다. 임란당시 이순신 장군의 진중에 따라 다니기도 하고 승군대장
으로서 의승수군을 이끌고 바다와 육지의 싸움에 나가 많은 공을 세웠다.
또 전쟁이 없는 휴전기간에는 병사들이 먹을 식량을 구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식량은 스스로 마련하기도 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이충무공이 돌아가신 뒤에는 쌀 600석으로 노량에서 수륙제(전쟁 중에 목숨을 잃은 병사들과 백성들의 명복을 비는 불공)를 열고 음식물을 많이 장만하여 충민사에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