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외교학과] 후쿠자와 유키치에 관하여

등록일 2002.12.02 한글 (hwp) | 7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후쿠자와에 관해서 정리한 발표문입니다
여러 논문에서 편집한 자료라 여느 책에서 볼수없는 내용이 많습니다

목차

성장과정
「학문을 권함」에 관하여
후쿠자와 유치키(福澤諭吉)
명치유신 초기에 복택의 조선론
정한론의 등장
복택의 문명론
아시아맹주론적, 문명지도자론적 조선론
時代新報(이후,지지신보)창간에서 임오군란까지의 조선론
복택의 중국론
조선맹주론적 조선론
갑신정변 이후의 조선론
탈아론
1892∼청일전쟁 이전까지의 조선론
청일전쟁 발발 이후 조선관

본문내용

성장과정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1월 10일, 오사카 도지마 나까츠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모모스케는 오랫동안 그곳에서 근무한 하급무사였다. 생후 1년 반만에 아버지는 병사하여 일가는 고향인 나까쯔로 돌아온다. 그러나 봉건시대의 문벌제도의 모순을 통감한 그는 청년기에 들어서자 우선 학문의 신천지를 찾아서 나가사키로 가서 마침내 오사카 난학의 대가인 오가타고안의 학당으로 들어가 난학의 학업에 애썼다.
1858년 25세의 나이로 에도에 나와 쯔끼지에 학당을 연다. 그것이 뒤의 게이오의숙의 전신이다. 이윽고 그는 난학이 시대에 적합하지 않음을 알고 영학으로 전환하여 독학하여 영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리고 양학의 실력을 인정받아서 막부에 등용되어 외교문서의 번역일에 종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전후에 걸쳐 막부의 외국파견사절단을 수행하여 세 번 서양에 갈 기회를 얻는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다시금 미국에서의 체험과 원서의 지식으로 ‘서양사정’ 이하 많은 서양소개서를 간행하여 그 이름을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1868년 그는 35세의 왕성한 일꾼이 되었다. 새로운 정부로부터 두세번 관직에서 일하기를 권유받았으나 받아들이지않고 오로지 민간인으로서의 게이오의숙에서의 교육과 국민계몽을 위한 저작활동을 사명으로 하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게이오의숙은 발상지인 쯔끼지에서 한때 신긴자로 옮겨져 그 후 1871년에 현재의 미타로 옮겼다.
그 동안 일본 최대의 서양식 학교로서 지위를 확립하였고, 출신자는 전국 신문명의 지도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또한 후쿠자와의 많은 저서는 매우 좋은 국민독복으로서 환영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학문의 권함’은 소위 문명개화의 바이블이 되어 사회적 영향이 엄청났던 것은 오늘날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엇다. 같은 시대의 ‘문명론의 개략’은 후쿠자와 사상의 가장 체계적인 저술로서 중요하다. 메이지 초년에는 10년 무렵 까지의 일본 문명개화의 기운은 후쿠자와에 의해 지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 일본의 관료국가체계가 강해짐에 따라 후쿠자와의 자유주의 사상은 시대의 주류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후쿠자와 자서전’은 일본 자서전문학의 최고봉으로서 정평이 있다.
1901년 2월 8일,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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