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가문 출신의 왕비
- 최초 등록일
- 2012.10.22
- 최종 저작일
- 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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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533년 교황 클리멘스 7세는 정치적인 안정을 되찾게 되자 에스파냐 왕국의 카를 5세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왕국과 동맹을 맺었고 카트린은 프랑수아 1세의 둘째아들 오를레앙 공 앙리(앙리 2세)와 정략 결혼하였다.
16세기에는 결혼이 일종의 외교협상과도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 신성로마제국의 영토 싸움과 전쟁은 적절한 결혼관계로 화해를 하기도 하고, 영토 분배를 하기도 한다. 카트린 역시 이러한 정략결혼의 대상이었다. 16세기에는 결혼만 잘 시키면 동맹을 맺은 효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는 메디치가의 이 소중한 보물인 카트린을 여러 후보자들 중에서 프랑스 왕인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 앙리 오를레앙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한다. 그러나 수많은 부와 권력을 누린 집안이지만 평민의 혈통이 왕족 가문에 시집온다는 건 프랑스왕실의 입장에서 몹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녀의 결혼은 교황과 프랑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의 이해타산에 의해 일종의 계약결혼으로 성사되었다.
이후 카트린은 정치적으로 대단한 정략가로서 냉혹하고 무서운 여인으로 비춰질 만큼의 철저한 정치가적 면모를 보여주며, 신교와 구교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힘의 균형을 추구했으며 그녀는 마지막까지 카페왕조의 왕권 신장과 보호를 위해 노력한 것으로 평가된다.
메디치 가문의 행보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닿아 있다. 메디치 가문은 레오 10세, 레오 11세, 클레멘스 7세 등 세 명의 교황을 배출했고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비롯하여, 코시모 1세의 딸 마리아 데 메디치(마리 드 메디시스)가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비가 되는 등, 유럽 여러 나라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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