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낙동강방어선전투
- 최초 등록일
- 2012.10.17
- 최종 저작일
- 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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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탈냉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여전히 남과 북이 서로 대치하고 있어 분단국이라는 냉전의 유산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이후 한국은 북한과 접촉하는 폭을 넓히고 민간부문에 있어서도 교류가 활발했지만, 북한의 핵개발 이후 남북협력은 전에 비해 훨씬 소원해진 상태다. 핵실험,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독단적인 행동은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를 더욱 난처한 상황으로 몰고 있다. 북핵문제와 관련한 6자회담 등 중대한 외교현안들이 이슈가 되고 있는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여러 강대국들이 얽혀 전개된 6·25전쟁에 대한 각인은 매우 중요하다.
6·25전쟁은 한국 현대사가 경험한 최대의 비극이었으며, 국제적으로도 2차 세계대전 후 시작된 냉전 확산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6·25전쟁 이후 반세기간의 민족분단은 국토분단의 차원을 넘어서서 정치, 민족 간의 분단구조를 형성하게 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그 존립의 근거마저 붕괴시키고 있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분단의 기폭제가 되었던 6·25전쟁이 더 이상 역사의 유물이 되어서는 안되며 이 통한의 분단체계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중 략>
미제5해병연대 3대대의 월미도 일대 녹색해안(Green Beach) 상륙작전은 오전 중에 성공리에 진행되었다. 이어 인천항이 만조가 된 오후 5시경부터 유엔 해군과 공군의 엄호사격이 다시 시작되면서 미 제5해병연대의 2개 대대가 인천항 북반의 적색해안(Red Beach)에, 미 제1해병연대는 인천항 남쪽의 청색해안(Blue Beach)에 각각 상륙하였다.
또한, 월미도 맞은편의 황색해안(Yellow Beach)에서는 인천 시가지에 대한 정면 공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공산군은 서울위수 제18사단과 인천경비 여단, 그리고 제31여단 예하의 1개 대대 등을 인천 일대에 배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엔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내륙으로 진입, 9월 16일 밤에는 예정된 교두보를 확보하고 계속해서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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