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시, 국군의 전력 증강 배경과 경과
- 최초 등록일
- 2012.10.08
- 최종 저작일
-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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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기서는 한국전쟁시 우리 국군의 전력 증강 배경과 그 경과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목차
1. 한국군 증강 계획의 배경
2. 한국정부의 국군 증강안과 미국의 계획
3. 한국군 2개 사단 증강 실현
4. 클라크 대장의 20개 사단 증편안
5. 국군 20개 사단 증강 실현
본문내용
1952년 클라크 대장이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한국군 증강이 본격적으로 거론됐고, 휴전 직후인 1954년 실현하게 됐다. 국방부는 1952년 4월 제2군단을 재창설하는데 이어 이후 육군의 규모를 확대시키는데 방안을 적극 모색했다. 따라서 10개 사단에서 20개 사단으로 증편하고, 미국도 10개 사단을 추가로 무장시키고 미군이 지휘하도록하는 요청안을 제출했다.
1. 한국군 증강 계획의 배경
한국군의 증강은 전쟁기간 중 1952년 5월 맥아더 장군에 이어 클라크 대장이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거론되었고, 휴전 직후인 1954년 완전히 실현을 보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1952년 초부터 휴전과 유엔군의 철군이 예상되자 휴전 이후의 국방을 고려하여 한국군의 증강을 검토하였고, 그 결과 국방부가 1952년 4월 5일 국군 제2군단을 재창설한 데 이어 육군의 규모는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했다. 따라서 육군의 규모를 10개 사단에서 20개 사단으로 증편하는 내용을 근간으로 국군 확장계획안을 준비했다.
<중 략>
클라크 장군의 한국군 증강안 결정은 다음 해로 넘겨지게 되었으나, 적어도 이 초청안으로 대규모 한국군 증강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이 무렵 유엔군이 구상하고 있던 국군 증강안의 목표는 전 전선을 학군군이 담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한편 1952년에는 북한군과 중공군도 병력, 화력, 공군력, 방어진지 등 모든 면에서 대폭적으로 전투력을 향상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유엔군측이 제시한 휴전조건을 거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차후 공세를 위한 군사력 증강에 주력하고 있었다. 공산군은 1952년 7월 중공군 63만 명, 북한군 25만 명 총 91만 명을 보유하였으며, 두 달 후인 10월에는 100만 명을 상회할 만큼 전력증강에 집중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