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 서경덕, 그는 왜 정치를 멀리하였나?
- 최초 등록일
- 2012.09.30
- 최종 저작일
- 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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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화담 서경덕은 조선 초기에 기일원(氣一元)의 철학을 확립한 유물론적 철학자이다. 호(號)는 화담(花潭). 가난한 양반 출신. 청년 시대에 외계(外界) 사물(事物)에 대한 철저한 사색을 통하여, 그 후 30년 동안을 벼슬에 오르지 않은 채 우리나라의 선배나 중국의 장횡거(張橫渠) 등 선진적 철학자의 철학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여러 문제들에 대해 고찰을 거듭하여 마침내 유물론적 자연관인 기일원철학(氣一元哲學)을 수립하였다. 그는 많은 등용 제의를 마다하고 향리에 있으면서 자기만의 고유한 철학을 발달하였다. 하지만 그는 많은 등용기회에도 불구하고 향촌에만 머물러 있었을까? 지금부터 그때 당시의 시대상황과 지금까지 미치는 서경덕의 영향을 중심으로 알아보겠다.
목차
①화담 서경덕의 생애
②여러 사람들의 서경덕의 평
③당시의 성리학에 시대특징
④서경덕이 정치에 입문하지 않은 이유
본문내용
①화담 서경덕의 생애
서경덕(徐敬德)은 당성인(唐城人)으로 자(字)는 가구(可久)요 호(號)는 복재(復齋)이다. 개성(開城) 성거산(聖居山) 기슭 화담(和談) 위에 초가집을 짓고 은거하여 도를 닦으면서 제자를 가르쳤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화담선생이라고 불렀다.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의 아들이며 모계는 실전(失傳)이다. 어머니가 공자(孔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그를 낳았다 한다. 나이 7∼8세에 이르자 총명하고 영특하여 어른의 말을 공경히 받들었다. 또한 그는 초년시절부터 자연현상에 대하여도 예사로이 보지 아니하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며 사색했다.
1502년(연산군 8) 14세 때 《서경》을 배우다가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인 일(日월(月)운행의 도수(度數)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해득하였다.
18세 때 《대학》의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조를 읽다가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을 하지 않으면 글을 읽어서 어디에 쓰리오!”라고 탄식하고, 천지만물의 이름을 벽에다 써 붙여 두고 날마다 궁구(窮究)하기를 힘썼다.
19세에 태안이씨(泰安李氏) 선교랑(宣敎郞) 이계종(李繼從)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31세 때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賢良科)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花潭)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더욱 힘썼다.
1531년(중종 26)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더욱 성리학의 연구에 힘썼다.
<중 략>
문화적으로는 유교적 교화를 위한 향약(鄕約)이 널리 장려되고 사상의 발전에 따른 학술적 성과들이 열매를 맺었으며, 또한 백성들의 생활과 직결된 윤리 지침서 서적 언해(諺解) 등이 발간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상을 통해 보면 16세기는 사회 경제적으로는 유교 국가의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에 있어 일정한 성과와 함께 혼란상도 보이고 있었으나 사상적으로는 유교 문화가 개화하던 시기라고 하겠다.
참고 자료
이종호, 『화담 서경덕』, 일지사, 1998.
황광욱, 『화담 서경덕의 철학사상』, 심산, 2003
申東浩 "화담 서경덕의 호학적 생애와 기학사상"
신병주 “서경덕: 개방적인 학풍, 처사의 길” 조선사를 이끈 인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