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1970년대의 노동운동 - 4.19 이후
- 최초 등록일
- 2012.09.08
- 최종 저작일
- 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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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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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4.19 이후 노동운동의 양태
1. 4.19 공간의 노동운동
2. 경제성장기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
3. 유신체제 하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
Ⅱ. 전태일 분신사건과 동일방직 사건
1. 전태일 분신사건
2. 동일방직 사건
본문내용
1. 4.19 공간의 노동운동
이승만 정권 말기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노동쟁의는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직접적인 역할은 하지 못하였지만, 대한노총1)을 무력화하고 새로운 노조연합을 결성하려는 움직임도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4.19 후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그 조직을 확대하고 조합의 민주화 요구와 간부진의 퇴진으로 무기력해진 대한노총과의 통합운동으로 이 두 단체와 무소속 노동조합까지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을 결성했다. 이후 노동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지만 5.16 쿠데타로 해산되었다. 한국노련의 각 단위 사업장에서 노조가 활발히 조직되고 쟁의도 전개되었지만 대중조직으로 자리잡지는 못하였다. 이런 한계는 당시의 객관적 조건과 노동자의식의 부족도 있지만 투쟁의 경험을 살리기엔 시간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는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는 것이 중심과제였다.
<중 략>
이에 이들은 8월 9일 신민당사로 농성장을 옮기기로 하였다.
8월 9일 신민당사로 농성장을 옮긴 YH 여공들은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이들의 행동은 여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반(反)유신 투쟁세력들은 이를 계기로 힘을 모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경찰은 8월 11일 새벽 2시 ‘101호 작전’이라는 명칭으로 강제해산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추락해 사망했으며, 농성 노동자뿐만 아니라 국회의원?당직자?출입기자 등이 폭행당하고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해서 YH 여공의 신민당사 농성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한 노동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당시 한국 사회의 문제를 표출하면서,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의 확대로, 그리고 유신체제의 붕괴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YH사건의 진압 이후,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이라는 정치적 사건은 부산 마산지역의 정치적 불만과 긴장을 고조시켰으며, 여기에 이 지역의 경제적 특수성은 부마민중항쟁으로 이어지기에 충분했다. 이에 대한 대응방법을 두고 내부 대립이 심화되어 유신체제는 붕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한국정치연구회 정치분과사, 『한국현대사 이야기 주머니 3』, 녹두, 1993
김삼웅, 『한권으로 보는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가람기획
임영태, 『대한민국 50년사 2』,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