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6두품의 활동과 제약,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저항에 관한 글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골품제의 성립과 변천
Ⅲ. 6두품의 역할과 대표인물
1) 6두품의 정치·사회적 활동
2) 6두품의 대표적 인물
Ⅳ. 6두품의 신분적 한계와 반발
1) 6두품의 신분적 한계
2) 왕거인 투옥사건과 최치원의「시무 10조」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골품제도(骨品制度)는 개인 혈통의 존비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 가옥의 크기, 의복의 색깔과 제작, 심지어 우마차(牛馬車)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을 부여했던 제도다. 이렇듯 골품제도는 소수의 지배 집단에게 특권을 보장했지만, 반대로 절대 다수의 피지배 집단에게는 상당한 제약을 가했던 신분제도다. 한편 지금까지의 골품제도에 대한 연구는 주로 제도의 형성과 운영 등의 제도적 장치에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골품제도 안에서의 6두품이다. 6두품은 지배 집단에 속하여 골품제도의 특권을 누렸지만, 골품제도 내에서의 신분제적 차별 때문에 정치사회적 진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러한 신분제의 제약 속에서도 계속 되었던 6두품의 활동들과 그들이 느낀 한계에 대해 초점을 맞추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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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설총(薛聰)
설총은 무열왕 때인 654년에서 657년 사이에 출생하여 경덕왕(景德王)대까지 생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복순,「신라의 유학자」,『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제 25집, 2004, 224쪽.
그는 요석궁에서 자랐던 덕분에 당나라의 다양한 고전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조남욱, 앞의 글, 38쪽.
그는 유학 경서를 읽고 새기는 방법을 이두(吏讀)라는 형태로 집대성함으로써, 한문을 신라화하고 지식인들이 유학과 한학(漢學)을 더 쉽게 익히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가 중국의 유학경서와 고전문학을 우리말로 풀어읽는 방법을 집대성하여 새롭게 발전시킨 것은 매우 획기적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정리한 이두는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관부의 공문서에 원용되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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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맺음말
7세기 중엽의 통일에서 8세기 말에 이르는 약 150년간 신라는 유학적, 중국적 국가체제로 큰 전환을 이루면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아직도 골품제의 질곡과 불교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런 점에서 귀족사회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한영우,『다시찾는 우리역사』1, 경세원, 2004, 157쪽.
한편 골품제도는 신라 중대까지 정복민과 피정복민을 신라사회에 결속시키는 가장 중요한 제도로 기능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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